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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몰상식이 아닙니다 (이사야 52장 7-12절)
작성자 미션퍼블릭 등록일 2011-12-02
이사야 52장 7-12절
(7절)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절)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9절)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절)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11절)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12절)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믿음은 몰상식이 아닙니다 (이사야 52장 7-12절)
 < 믿음은 몰상식이 아닙니다 >
 
   요새 사회상을 보면 상식 이하의 일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도 상식 이하의 일이 벌어집니다. 믿음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그린벨트를 싼값에 사서 그곳에 불법 건축물을 지어놓고 교회를 지을 수 있는 대지로 지목변경을 해달라고 40일 특별기도 하는 것은 몰상식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입니다(1절). 그런데 왜 요새 그 발을 추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집니까? 참된 믿음의 원리를 오해해서 지성을 무시하고 불화를 조장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상식과 지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은혜의 바탕 위에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추구할 것은 추구하십시오. 참된 믿음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과학적인 지식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과학은 반목관계나 모순관계가 아니라 보충관계입니다. 과학자가 믿음의 실체를 무시합니까? 아닙니다. 과학의 문턱에 들어서면 과학 때문에 신앙을 버리지만 과학에 깊이 들어가면 과학 때문에 신앙을 찾습니다. 특히 천문학자치고 무신론자는 없다고 합니다. 우주의 놀랍고 오묘하고 완벽한 질서를 보면서 절대자에 대한 신앙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해서 과학을 멸시하면 안 됩니다.
 
   간혹 영적인 비밀에 정통했다는 어떤 영성론자는 과학을 멸시합니다. 그들은 “내가 안수하면 손에서 불이 나가는데...”하고 교만해서 과학을 우습게 압니다. 자기 손이 라이터인 줄 압니다. 어떤 영성론자는 말합니다. “의사는 돈 벌기 위한 마귀 사자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이미 병이 다 나았는데 무슨 병이냐? 병들었다는 말은 마귀가 의사를 통해 들려주는 거짓말이다.” 황당한 성경해석입니다.
 
   저의 글과 설교를 보면 극히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의사를 ‘의사’로 지칭하지 않고 항상 ‘의사 선생님’이라고 지칭한 것을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단순히 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육신의 건강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분이기에 그런 존칭을 붙여야 마땅합니다. 잘못된 영성론자들의 영성을 과시하는 황당한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학문을 무시하는 것은 영성이 깊은 태도가 아니라 미성숙한 태도입니다. 성도에게는 기도하는 ‘골방’과 사랑을 나눠주는 ‘사랑방’도 필요하지만 지성을 위한 ‘글방’도 필요합니다.
 
  <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십시오 >
 
   본문을 보면 선지자가 말한 ‘좋은 소식’의 실체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7절).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절망과 불신과 미움의 땅을 떠나 희망과 신뢰와 용서의 땅으로 떠나는 삶이 바로 믿음입니다(11절). 희망의 땅으로 떠나는 것이 때로는 두렵지만 그때 하나님이 앞에서 행하시고 뒤에서 호위해 주십니다(12절).
 
   마음에 평화는 하나님의 통치가 내 마음에 시작될 때 생깁니다. 욕망이 내 마음을 통치하면 평화가 깨지지만 하나님이 내 마음을 통치하면 평화가 생깁니다. 욕망은 다툼을 만들지만 하나님은 하나 됨을 만듭니다. 결국 오늘날 성도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통치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과 속이 달라 보이고 앞과 뒤가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미셸 투르니에의 '뒷모습'이란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등은 거짓말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감한 사람이/ 내게 왔다가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음을/ 얼마나 자주 깨달았던가/ 돌아선 그의 등은 그가 어떤 사람임을 잘 말해준다.” 살면서 자신이 남긴 자국과 자취가 중요합니다. 화장으로 주름살은 가릴 수 있어도 뒷모습은 가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머물다간 자리에 남는 자취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왜 앞모습과 뒷모습이 달라집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이 넘치게 됩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던 돌멩이가 다윗의 손에 들려지자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과 만났을 때 성녀로 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손에 쓰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새롭게 되고 놀라운 가능성을 가진 축복의 주인공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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