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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 (갈라디아서 6장 11-16절)
작성자 요삼일육선교회 등록일 2021-10-25
갈라디아서 6장 11-16절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 (갈라디아서 6장 11-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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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 여정의 3단계 >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 역사는 세 시대로 구분된다. 첫째, 노예로 지내던 애굽 시대다. 그때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 백성으로서 자유와 소유권이 박탈된 채 살았다. 둘째, 광야에서 방황하던 광야 시대다. 그때 430년 만에 애굽에서 탈출했지만 온전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해서 조금만 어려워도 수시로 애굽을 바라보았다. 셋째, 가나안에 정착한 가나안 시대다. 그때 가나안에서 땀 흘림과 씨 뿌림과 전쟁 승리와 문제 극복을 통해 이전에 약속된 복을 실체로 만들었다.
 
   개인의 신앙 여정도 세 시기의 삶으로 구분된다. 첫째, 애굽의 삶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듯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진 죄의 노예로서 소유와 먹을 것에 매달려 산다. 그러면 더 배고픔이 느껴진다. 예전에 군대에서 신병 때 제일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금방 또 배가 고팠다. 그처럼 죄의 노예로 살면 늘 배고프고 목마르고 부족하다. 세상 것은 아무리 가져도 더 가지고 싶고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광야의 삶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죄의 노예 상태는 벗어났지만 믿음이 수시로 흔들려서 광야 훈련을 자초한다. 그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예전처럼 일이 잘 되면 금방 좋아하다가 일이 안 되면 금방 상심하면서 환경과 상황에 매여 사는 신자가 광야 신자다. 그런 광야의 삶을 탈피하지 않으면 계속된 광야 훈련으로 고생하다가 죽는다. 왜 구원받은 성도에게 고난이 계속되는가? 구원의 믿음을 행하는 믿음으로 성숙시키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환경적인 신자에게도 은혜는 주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서 불평했어도 홍해가 갈라졌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어도 하늘의 만나가 내렸고 마라의 쓴물 앞에서 불평했어도 쓴물이 단물로 변했다. 그런 기적이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선교지에서는 그런 기적이 비교적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것과 같다. 기적을 많이 체험한다고 믿음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성숙한 믿음은 기적 체험 횟수와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삶에서 가나안의 삶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해 막 광야에 나왔을 때는 여러 기적을 통해 믿음의 맛을 보여 주신다. 처음 믿는 선교지 신자들에게 믿음을 굳게 하려고 기적을 많이 나타내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도 처음 믿을 때는 말씀을 잘 몰랐어도 기적적인 체험을 많이 했다. 문제는 오래 믿었으면서도 광야에서의 기적 체험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목적은 광야에서 기적을 체험하며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 평안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가나안의 삶이다. 가나안의 삶은 요단강을 건널 때 주어지는 삶으로서 환경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원망과 불평보다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삶이다. 물론 가나안의 삶에서도 때로 여리고성과 같은 큰 문제의 장벽 앞에 놓이지만 그때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문제를 극복하며 약속된 복의 지경을 넓혀가는 삶이 가나안의 삶이다. 가나안의 삶을 살려면 만나의 기적이 광야 때처럼 무조건 주어지기를 기대하지 말고 심은 대로 거두는 삶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고 감사하라.
 
  < 좋은 씨를 많이 뿌리라 >
 
   여호수아 5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고난의 땅인 광야에서는 만나가 기적적으로 내렸지만 축복의 땅인 가나안에서는 오히려 만나의 기적이 그쳤다. 언뜻 보면 만나의 기적을 거의 매일 체험하던 광야의 삶이 더 복된 삶 같지만 만나의 기적이 그쳐도 광야의 삶보다 가나안의 삶이 훨씬 복된 삶이다.
 
   왜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만나의 기적을 그치셨는가? 그들이 스스로 심고 거둘 땅을 주셨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삶은 기적을 기대하고 추구하는 삶보다 힘써 노력해서 심은 대로 거두는 삶이 핵심이 되는 삶이다. 가나안의 복을 원하면 좋은 것을 더 심기에 힘쓰라. 가나안의 삶을 살면 광야의 삶을 살 때보다 기적 체험이 더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신기한 기적이 없을지라도 선한 씨앗을 많이 심는 삶이 복된 삶이다.
 
   신약 시대는 은혜 시대지만 ‘은혜’를 심지 않고 거두려는 공짜 심리를 부추기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썩어질 것을 심고 영생을 거두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선행을 심어도 소용없기에 예수님이 대신 심어주셨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스스로 많이 심으라. 자녀의 앞날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 자녀에게 믿음의 씨를 힘써 뿌리면 뿌린 대로 거둔다.
 
   행위가 구원을 좌우하지는 못해도 상급은 좌우한다. 세상에서 놀며 지내다가 천국에 온 사람과 죽도록 헌신하고 천국에 온 사람의 상급은 다르다. 주일에 한번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과 매일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하는 사람의 상급도 같지 않다. 교회에서 말없이 기도하고 봉사하면 이 땅에서는 이름이 빛나지 않아도 천국에서는 그 이름이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이 땅에서도 이름이 빛날 때가 많다.
 
   눈앞의 것에 욕심을 내고 너무 계산적으로 살지 말라. 계산적으로 살면 잠깐 많이 소유해도 그런 소유는 시간이 문제일 뿐 일부 혹은 전부가 조만간 내 곁을 떠난다. 그때는 그냥 순순히 떠나지 않고 대개 마음에 고통을 주고 비명을 지르게 하면서 떠나간다. 즉 실패나 사기나 위자료나 병원비나 자녀 문제 등으로 돈이 떠나면서 인색했던 마음에 고통을 주고 떠난다. 그처럼 돈을 강제로 떠나보내면서 아픔을 겪지 말고 자발적으로 좋은 일에 보냄으로 하늘의 기쁨과 보람과 얻어 누리라.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에 힘쓰면 삼중의 복, 즉 믿음의 복, 행복의 복, 그리고 보상의 복을 받는다. 거룩한 일을 위해 나의 소중한 물질을 떠나보내면 믿음이 자라고 내 물질이 가치 있게 쓰인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행복해지고 장래에 그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도 있으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써 심으면 지금은 힘들고 즉각적인 보상이 없는 것 같아도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둔다.
 
  <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 >
 
   사도 바울은 성도에게 선의 씨를 뿌리라는 실천적 명령 후에 본문에서 율법주의를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이 말씀을 보면 끝까지 진실하게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았던 사도 바울의 삶을 읽을 수 있다. 본문 11절을 보라.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왜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갈라디아서를 썼는가? 그가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에 심한 노동과 박해로 작고 정교하게 글씨를 쓰기 힘들어 큰 글자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
 
   필자는 학생 때 심한 격투기 운동을 해서 생긴 약간의 수전증으로 인해 한동안 필체를 잃어서 글씨를 작고 정교하게 쓰지 못했었다. 그런 비슷한 증상 때문에 바울이 큰 글씨로 갈라디아서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이 보기 편하도록 서신 전부를 큰 글자로 썼을 가능성도 있고 본문 12절 이하의 갈라디아서 결론 말씀을 좀 더 강조해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에 확실히 각인시키려고 그 부분만 큰 글씨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 바울이 결론적으로 강조한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할례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는 말씀이다(12-16절).
 
   십자가 외에 다른 자랑은 대개 헛된 자랑이다. 세상 자랑에 빠지지 말라. 자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십자가의 의미를 참으로 알면 세상 자랑을 멀리하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의 십자가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 현재의 십자가는 미래의 영광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기쁘게 감사하며 지라. 십자가는 ‘주님의 버림받은 존재’라는 표식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표식이다.
 
   왜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했는가? 거기에 구원과 축복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축복을 원하고 거룩한 신맥을 원하면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하시는 최상의 축복이 주어진다. 결국 어려움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최상의 축복 기회로 만들 수 있다.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소나무의 생명력을 알게 되듯이 내가 어려울 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의 믿음의 진실성을 남도 알 수 있고 나도 알 수 있다.
 
   어려움 중에도 한결같은 믿음을 보일 때 하나님은 하늘의 은혜를 선물로 주시고 모든 상황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힘들 때도 믿음만은 흔들리거나 시들지 말라. 남이 힘들어서 떠날 때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내 사명의 자리를 힘써 지키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처음에 제자들은 다 도망쳤지만 성령 충만의 체험 후에는 모두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십자가를 졌다. 십자가를 외면한 성령 충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려운 자리를 피하지 말라. 주님의 은혜만 좋아하지 말고 먼저 주님의 사람이 되라. 비전 성취가 늦어져도 조급해하지 말라.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면 최종적으로 손해나는 일은 없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오랫동안 추구한 거룩한 가치들이 다 들어있음을 깨닫고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만 자랑하면서 행복과 축복의 길을 찾아냈다. 그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행복과 축복의 길을 찾아내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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