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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교제하는 삶 (빌립보서 2장 1-4절)
작성자 요삼일육선교회 등록일 2022-01-10
빌립보서 2장 1-4절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 (빌립보서 2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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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 >
 
   빌립보 교회는 좋은 교회였지만 작은 분쟁이 있었다. 어떤 분쟁인가? 그 분쟁을 유추할 수 있는 말씀으로서 빌립보서 4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의 중심 역할을 했던 2명의 여성 리더였다. 그들 간의 갈등이 무엇이었는지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의 갈등 해결책으로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권면했다.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무슨 교제’란 표현을 썼는데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1. 마음을 같이하는 삶
 
   유오디아 파와 순두게 파의 대립은 진리 싸움이나 정책 대결이나 의견 갈등이 아니고 마음이 나뉜 감정싸움이었다. 그래서 유오디아 파가 어떤 것이 좋다고 하면 순두게 파는 그냥 그것이 싫고 순두게 파가 어떤 것이 좋다고 하면 유오디아 파는 그냥 그것이 싫은 것이 문제였다. 문제 해결이 가장 힘든 것이 그냥 싫은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냥 싫은 것이 아니라 싫은 원인이 있다. 처음에는 그 원인이 문제지만 점차 감정싸움이 되면서 마음이 나뉘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마음이 나뉘면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 복 받으려면 한 마음을 품으라(2절).
 
   삶의 문제는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마음만 고치면 많은 것을 고칠 수 있고 마음이 건강하면 어떤 불행도 극복할 수 있다. 어떻게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가? 무엇보다 성령 충만이 필요하다.
 
   마음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꿈을 이루고 삶이 편안해지면 마음이 잘 관리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마음 관리다. 복 받고 잘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하지만 나도 마음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축복 받고 받은 축복을 잘 유지시키려면 마음 관리에 힘쓰라.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면서 마음의 천국을 이룰 때 하나님의 은혜도 끊이지 않고 넘치게 된다.
 
  2.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삶
 
   왜 다툼이나 허영이 있는가? 겸손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겸손을 권면하는 말씀은 바울 당시에는 파격적인 말씀이었다. 당시 헬라 문화에서는 좋은 의미의 ‘겸손’이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헬라 사람들은 겸손을 ‘저열함, 비천함, 소극적임, 노예근성’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겸손의 가치를 높이면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되기를 힘쓰라고 했다(3절). 겸손하지 않으면 비판적으로 되면서 은혜도 사라지고 불행해지지만 겸손하면 비판이 줄면서 은혜도 주어지고 행복해진다.
 
   총회에서 정의로운 발언을 많이 하는 A 목사는 늘 높은 마음을 가지고 다른 교회와 다른 목사의 잘못을 많이 지적했다. 동료인 B 목사가 속으로 “저런 식으로 행동하면 목회가 힘들 텐데.” 하고 늘 걱정했다. 결국 A 목사는 교인들과의 잦은 갈등 끝에 교회를 떠났다. 그 소식을 듣고 B 목사가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라고 마음속에 은근히 고소한 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면서 속으로 “나도 마음을 고쳐야겠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라.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면 남을 불의하게 여기면서 오히려 자신이 누구보다 불의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사람은 다 부족하다. 하나님이 다 부족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왜 그런가? 서로 겸손하게 섬기며 살라는 뜻이다. 나의 부족함을 인식해야 부족한 남을 감싸 줄 수 있다. 부족한 상대를 볼 때 교만하게 “나는 너와 달라.”라고 하지 않고 겸손하게 “나도 너와 같아.”라고 하면서 마음의 천국을 이뤄 낼 때 성령님이 그 마음이 찾아와 주신다.
 
  3. 남을 돌보아 주는 삶
 
   본문 4절을 보라.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이 구절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라는 말은 자기 일도 잘 돌보라는 뜻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전혀 돌보지 않고 남만 위해 살려는 것은 무책임이 될 수 있다.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남도 돌보라. 나만 위해 살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병에 걸린다. 반면에 남도 생각하며 살면 영혼과 육신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
 
   돌봄과 섬김을 교회 생활의 기본 바탕으로 삼으라. 교회는 부족한 사람이 찾는 곳임을 잊지 말라. 교회는 완벽한 의인이나 강자가 찾는 곳이 아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은 대개 약자다. 사실상 사람은 다 약자이고 병자다. 마음의 병자가 교회를 찾지 자기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여기면 교회를 찾지 않는다. 인간적인 성취를 하고 생기는 공허함도 일종의 병이다. 그런 인간 현실을 이해하고 서로 돌봐주려고 하라.
 
   아무리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교인이 있어도 필요한 경우에 전략적으로 멀리하는 한은 있어도 그를 비웃지는 말라. 내게도 병든 모습이 있으면서 남을 병들었다고 비웃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에서 용서와 용납이 넘치게 하라. 엄하게 정의를 세우려고 할 때도 용서와 용납의 정신이 정의의 바탕에 깔리게 하라. 서로 인자하게 대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해야 교회가 교회답게 된다.  
 
  < 하나 되기를 힘쓰라 >
 
   가정과 교회에서 사랑과 용서와 믿음으로 서로 돌보고 섬기려고 하라. 그때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 특히 겸손함을 잃지 말라. 어떤 사람은 영성 과시가 심하다. 그러나 영성이 있게 보이려는 것은 영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는 것이다. 신비하게 보이려는 것은 신비한 것이 아니라 수준이 낮은 것이다. 신비를 체험해도 신비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진짜 수준 높은 마음이다. 결국 마술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신비가 아니라 신비한 체험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 신비다.
 
   자기 영성을 드러내어 남을 감동시키려는 것도 세상적인 경쟁 심리가 교회로 침투한 것이다. 영성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심을 잘 극복하라. 기도할 때도 절제의 영성을 구하라. 기도하는 삶은 감동을 주지만 기도하는 것을 보이려는 삶은 감동도 없고 하나님을 감동시키기보다 사람의 뇌피만 감동시킨다. 바르고 순수한 기도는 복된 기도지만 신비하게 보이려고 기도를 주문화하는 기도는 복된 기도가 아니다.
 
   기도할 때 “삼바라삼바라 을라라라라라라라라...”라고 기도하면 리더 입장에서는 팔로워를 기도에 몰입시키는 데 좋다. 방언은 거짓 방언이라도 마취적인 능력이 있기에 성령의 역사가 아닌 상태에서도 종교 리더들은 그렇게 인위적으로 기도를 이끌어 맹목적인 추종자도 얻고 공동체도 키우고 성공적인 종교인이 되고 싶은 충동이 수시로 생긴다. 그처럼 기도 모임을 잘 이끌고 권세 있는 리더십을 행사하려고 인위적으로 방언을 유도하면 성령 충만보다 거짓 충만이 습관화될 수 있다. 그러면 복과 치유가 없어도 복과 치유를 얻었다고 스스로 속일 수도 있다.
 
   기도의 목적은 기도를 외적으로 잘하거나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서고 궁극적으로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다. 그래서 모여서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혼자 깊은 기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단 시간적으로도 무리 기도와 개인 기도는 비교가 안 된다. 모여서는 몇 시간 기도하기도 힘들지만 혼자서는 일주일에 수십 시간을 생활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많이 인용하지만 그 말씀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에 가깝다.
 
   어떤 교회에서 교인 간의 갈등 심화로 서로 싸우면서 기도회를 따로 가졌다. 그때 담임목사 그룹은 1층에서 기도하고 전임목사 그룹은 2층에서 기도하면서 더 많이 모여 더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경쟁이 벌어졌다. 서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겠다고 그렇게 기도해도 두 마음으로 미워하면서 기도하면 아무리 많이 모여 크게 기도해도 응답은 없다. 서로 축복을 빌어 주며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합심 기도이지 미워하고 경쟁하며 두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합심 기도가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정체되는 상황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성경 공부와 성령 충만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 공부를 많이 해도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헛된 공부가 된다.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연구해서 성경 지식을 많이 안다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고 추구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을 기뻐하라. 말씀을 연구하기보다 추구하라.
 
   또 한 가지 깨닫는 것은 진짜 성령 충만과 거짓 성령 충만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사와 능력과 영성이 있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교주는 최대한 멀리하라. 그것이 신상에 이롭고 영혼에 이롭다. 영성이 있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영성이 있다는 칭송을 들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성령님과 하나 되려고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서 사람과도 하나되려고 하라. 그런 삶을 통해 늘 성령님과 교제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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