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덮어주는 삶의 행복
어느 교회 가족찬송 경연대회에서 한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다.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그 집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얼른 자리에 돌아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로 이어 담임목사 가정이 찬송을 불렀다. 그런데 담임목사도 어떤 부분에서 가사를 틀리게 불렀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와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느 날, 그 목사가 과로로 쓰러졌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들이 담임목사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를 죽 읽는데 어느 날의 일기를 보고 장로들은 모두 한 바탕 울었다. 그 날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7월 14일. 교회 가족찬송 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깁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음은 남의 수치를 가려주려고 나의 수치를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남의 허물을 보기 즐거워하고 오래 기억하고 들춰내려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고 남의 허물을 안 보려고 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덮어주려는 마음은 행복한 마음이다. 불행은 알아달라는 마음에 찾아오고 행복은 알아주려는 마음에 찾아온다.
허물을 보는 눈이 커지면 사물을 보는 눈이 작아진다. 남의 허물을 찾으려는 안간힘은 나의 허물을 감추려는 안간힘이다. 남의 허물을 잡았다고 해서 그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허물을 잡는 과정에서 자신이 패배적인 삶을 살게 된다. 반면에 남의 허물을 덮어준다고 해서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면 그의 승리를 보면서 자신이 승리하게 된다.
남의 허점을 보려고 현미경을 들이대고 확대해석할수록 현재 자신이 패배자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해 안 되는 일에도 항상 이해할만한 구석이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가지고 남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된다. ‘남 탓하기’는 사람됨(integrity)을 잃어버리는 길이고, ‘허물 덮어주기’는 사람됨을 되찾는 길이다.
행복은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품이 아니다. 행복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행복은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을 만들듯이 누군가와 함께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천사와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 사는 것’이다. 서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사랑의 보자기로 덮어가며 살 때 모난 사각형 인생이 아닌 부드러운 원형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 행복편 중에서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