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삶을 사는 길(2) (시편 37편 22-29절)
4. 축복 약속을 믿으라
본문 28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살다 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의심이 될 때가 있다. “어떻게 불의한 저 사람이 저렇게 잘 되고 왜 나는 이렇게 힘들까?”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의는 의대로 심판하시고 불의는 불의대로 심판하신다. 불의한 자의 성공은 영혼을 잠재우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될 수 있고 의로운 자의 실패는 영혼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거룩한 채찍이 될 수 있다.
가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를 버리지 않고 영원히 보호해주신다. 너무 힘들면 그 사실이 의심되고 자기만 불행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이 상처를 크게 만든다. 특히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악인이 형통한 것’이 더 억울하고 더 고통스럽고 그런 불의한 상황을 그냥 침묵하며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기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왜 기도생활에 실패하는가? 기도에 대한 패배적인 생각 때문이다. “기도해도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기도를 막는다. 천 날 동안 매일 기도했는데 축복이 없다면 속은 상해도 그런 대로 견딜 만하다. 그러나 하루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잘된다는 소문을 들으면 믿음에 회의가 생긴다. 그때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잘 믿어지지 않고 아무리 믿음의 선배가 위로해도 소용이 없다.
물론 이제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는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당장 벼랑 끝에 몰리면 그런 상황을 허용하신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이 생기고 믿음의 뿌리가 흔들린다. 단 한 발자국만 디딜 공간이 있어도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겠지만 벼랑 끝에서는 원망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로 그때를 위해서 믿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때는 좋은 줄 알았던 믿음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살다 보면 절망적인 때를 만난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이 전적으로 자신 때문에 겪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고통은 그렇게 크지 않지만 큰 잘못이 없는데도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면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에 대한 배반감이 생기면서 심적 고통은 더 커진다. 그때 믿음은 아수라장이 되고 기도와 봉사에 대한 패배의식이 영혼을 더욱 짓누른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벼랑 끝에서 벼랑 밑으로 매정하게 떠미는 것 같다. 그런 상황을 작은 머리와 작은 믿음으로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때 사람들은 대부분 원망한다. “하나님! 정말 너무하세요. 어떻게 상황을 이렇게 만드시나요?” 그러나 그때도 본문의 다윗처럼 하나님은 성도를 버리지 않고 영원히 보호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라. 믿음이 커지면 벼랑 끝에 몰린 것도 축복임을 깨닫게 된다.
벼랑 끝에 몰린 것이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축복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것도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때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고 매달리면 사실상 그것만큼 복된 일은 없다. 그처럼 ‘거룩한 항복의 은혜’는 잘 나갈 때는 체험하기 힘들다. 그 은혜는 대개 벼랑 끝에서 체험한다. 사람은 스스로는 잘 항복하지 않는다. 그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나님은 벼랑 끝으로 모는 것이다.<2016.12.3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