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로마서 7장 1-6절)
< ‘율법’ 남편과 ‘은혜’ 남편 >
관계는 약속을 통해 지속된다. 약속에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약속과 에로스적인 사랑의 약속이 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는 사랑이고 에로스적인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께 찾아가는 사랑이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계산적인 생각이 없기에 질투를 수반하지 않지만 에로스적인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기에 질투를 수반할 수 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고 괴롭힐 수 있는 것이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성경 진리는 아가페적인 것이고 세상 철학은 에로스적인 것이다. 은혜의 원리는 아가페적인 것이고 율법의 원리는 에로스적인 것이다. 에로스적인 사랑도 나쁘게 활용되지 않으면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에로스가 아가페보다 앞설 수 없듯이 율법이 은혜보다 앞설 수 없다. 형식은 필요한 것이지만 내용보다 앞서면 안 된다.
본문은 율법에 매인 삶을 부부관계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본문 1절을 보라.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주관할 수 있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율법이 죽은 사람은 주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남편 있는 여인이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인 바 되지만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게 된다(2절).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지만 남편이 죽으면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가도 음녀가 되지 않는다(3절). 이 표현에서 ‘아내를 붙들어 맨 남편’은 율법을 상징하기에 “남편의 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은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매인 삶에서 해방되는 길은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는 남편이 죽든지, 또 하나는 자기가 죽든지 하는 것이다.
어느 가정에 스스로의 삶을 완벽하게 여기는 ‘율법’이란 이름의 남편이 있었다. 그 남편은 스토커처럼 아내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감시하고 판단했다. 그런 남편과 지내면서 아내는 숨이 막혀 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다 보면 잘못할 수도 있는데 조금만 잘못해도 따지고 판단해서 사는 것이 고통이었다.
남편이 비판하고 정죄하는 말을 들어보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따지면 다 바른말이었지만 문제는 허물을 덮어주는 너그러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남편과 고통스럽게 살면서도 남편이 간통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잘못도 없기에 이혼할 수 없었다. 법정에서도 이혼 사유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그 남편이 죽었다. 비로소 그녀는 합법적인 자유를 얻고 새로운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새롭게 결혼한 남편은 ‘은혜’란 이름을 가졌다. 그녀는 새 남편과 살면서도 여전히 실수하고 잘못했지만 새 남편은 아내의 실수와 잘못을 덮어주면서 바른길을 가도록 격려했다. 그녀는 새 남편의 사랑에 감동하면서 비로소 사랑의 실체를 깨달았고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깨끗한 삶을 살려고 더욱 몸가짐을 바로 했고 열매 맺는 삶을 살려고 힘썼다. 그것이 본문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의 의미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자유를 얻지만 실제로 ‘율법’이란 남편은 죽을 수 없다. 은혜의 깊은 맛을 알려면 율법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율법이 폐기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이 자유를 얻는 방법은 자기가 죽는 길밖에 없다. 그 죽는 길을 예수님이 대신 가심으로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찾게 하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4절).<2017.9.4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