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의 노래
2004년 9월,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인질극으로 희생된 러시아 베슬란 하늘은 잿빛이었다. 자녀와 손자를 공동묘지에 묻은 베슬란 시민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울었다. “신이여! 왜 어린아이까지 데려가십니까? 우리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곧 공동묘지에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멀리 베슬란을 지나는 기차는 조의의 표시로 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공동묘지 곳곳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 쓰러진 어머니들을 앰뷸런스에 싣고 있었다. 연년생 자매를 잃은 한 여성은 딸의 이름이 새겨진 비목을 밤새 쓰다듬다가 혼절해버렸다. 친척이 사망하면 대문과 창문을 열어 놓는 관습으로 인구 4만 명의 베슬란에는 문이 닫힌 집이 거의 없었다.
당국의 허가로 참사 현장을 찾은 친구들은 그곳에 꽃, 물통, 과자를 내려놓았다. 목이 말라 자신의 오줌을 옷에 적셔 마셨다는 친구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주민들의 입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야수도 어린이는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전부를 뺏어갔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오래전에 체첸 병사들도 러시아를 향해 똑같이 말했었다. “그들은 우리의 전부를 뺏어갔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있다. 남편과 자녀들을 잃은 여성으로 구성된 체첸의 여성 테러단인 ‘검은 과부들’은 또 다른 ‘검은 과부들’을 만들고 있다. 아무리 좋은 명분도 증오를 낳는 것은 선이 아니다. “불의와 싸우라!”는 말은 실생활에서 진짜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의로 불의를 이기라!”는 말이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선한 전쟁은 ‘십자가 전쟁’이었고 가장 불행한 전쟁은 ‘십자군 전쟁’이었다. 십자가 전쟁은 자기를 죽이고 평화를 만들려는 선한 전쟁이었고 십자군 전쟁은 남을 죽이고 평화를 만들려는 불행한 전쟁이었다. 악과 싸운다는 명분을 가지고 똑같은 악을 저지르는 것은 더 악한 선택이 될 때가 많다. 방안의 어둠을 물리치려면 어둠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어둠과 싸우려고 하지 말고 손을 내미어 스위치를 켜서 빛을 비추려고 해야 한다.
체첸 전선에서 쓰러진 수많은 병사들과 베슬란 어린이들은 부모 형제들을 남겨둔 채 백학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안개 속으로 어스름히 날아가는 백학의 대오 속에 보이는 빈자리는 곧 우리들의 자리가 된다. 언젠가 그 빈자리를 우리가 차지해 같이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대지에 남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지막 한 마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과 용서’라는 말일 것이다.
베슬란 참사에서 첫 희생자는 74세의 체육 교사 이반 카니지였다. 인질범들은 그가 고령임을 알고 내보내려 했지만 그는 나가지 않고 어린이들의 몸에 장착된 폭발물을 떼다 사살되었다. 그는 ‘바보 이반’이었다. 백학이 되어 날아간 베슬란 어린이들은 지금 천상에서 이 시대의 ‘바보 이반’을 목 놓아 부르고 있을 것이다. 이한규의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 지혜편 중에서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