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인 간의 소송 문제 >
고린도전서는 ‘교회 문제에 관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고린도전서는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말씀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간의 소송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소송에 관해서 본문이 교훈하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1. 교회 내의 문제는 교회 내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이 구절에서 ‘불의한 자들’은 ‘믿음이 없는 재판관’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교인 간에 분쟁이 생기면 세상 법정에 호소하지 말고, 교회 내에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실질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한 교인이 형제에 대해서 소송을 했다는 암시입니다.
교인 간에 소송을 벌이는 모습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본다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상처 입히고, 전도는 막는 행위인지 모릅니다.
교인 간에 소송은 사단의 공격에 교회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성도는 심판을 받는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성도는 마지막 때에 세상을 심판하는 위치에 있는 자랑스러운 존재인데, 세상의 심판을 받으려고 소송을 받았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을 보면 소송이 제기된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 사소한 문제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가는 것은 아주 잘못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심지어 성도는 천사까지 판단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 법정에 재판을 호소하면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졌다고 하는 지혜는 어디로 다 가고 문제를 세상 법정까지 끌고 가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3. 형제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살다 보면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생긴 문제도 가급적이면 최대한 소송을 자제해야 합니다. 소송을 하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가 낭비되는지 모릅니다.
더욱 형제간의 소송은 더욱 피해야 합니다. 형제간의 소송은 모든 선택의 수단에서 마지막 선택의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간의 소송은 이미 형제간의 사이가 영원히 벌어질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교인 간에 소송이 벌어지면 누군가 한 사람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스스로 해결합니까?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법정에 최대한 호소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 호소하려고 해야 합니다.
4. 형제간에 돈 거래는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이 말은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입니다. “형제에 대하여 어떻게 소송을 할 수 있느냐? 그것 자체가 불의이다.”라는 뜻도 있고, 또한 이 구절을 보면 이 소송이 돈 문제로 사기를 쳤다고 생각하는 교인 간에 벌어진 소송이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가 가끔 터지는데 거의 대부분이 바로 돈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끼리의 돈 거래는 없어야 합니다. 교인들끼리 채권자가 되고 채무자가 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복주의로 하지 말아야 하듯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헌신할까를 생각해야지 금전적인 유익을 얻을 생각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5. 형제간의 문제는 손해 보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사람들은 정의의 판단을 믿고 자신이 허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송을 하고 권리를 찾으려고 하지만 이미 소송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 큰 허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허물을 노출할 바에야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고, 차라리 손해 보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무슨 정의로운 변명을 갖다 붙여도 이미 소송을 했다는 것은 사랑과 용서를 저버린 행위이고 교인으로서 큰 허물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희생하고 양보하고 손해를 볼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양보하면 하나님께서 양보하는 사람에게 영원히 손해 보도록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를 가지고 양보하는 사람에게 양보한 것 이상의 유익을 반드시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마음을 가지고 손해 보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라 나중에 보면 다 유익이 됩니다.
소송을 하면 소송에 패배해서 가산이 거덜 나는 경우가 많고, 소송에 승리해도 영적이고 정신적인 손해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양보하면 겉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얼마나 유익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내게 손해를 끼쳤을 때 그 상황을 소송으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기려고 하십시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최선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 십자가의 사랑에는 손해가 없습니다 >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는 결코 손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종교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경우에 사랑하고, 희생할 수 없는 경우에 희생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축복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한 사랑의 범위를 더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면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거의 조건 없이 사랑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결코 손해가 없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몰라도 언젠가 나의 사랑은 메아리가 되어 큰 유익으로 내게 돌아올 것입니다.
가끔 보면 성경을 100독 했다는 사람, 200독 했다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만큼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실제로 성경이 말하는 핵심이 십자가의 사랑인 줄 알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면 그는 성경을 200독 한 사람보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훌륭한 공로를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사람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성경66권설교파일 중에서 고린도전서 18번째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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