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마인드를 가지라 (로마서 15장 22-33절)
< 성도의 최소한의 자존심 >
기독교는 물질적인 축복을 따라오게 할 때가 많다. 그 사실은 세계 역사가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을 외면한 영적인 축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물질문명이 번창하고 강대국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물질적인 풍요가 오히려 믿음을 잡아먹는 우는 사자의 아가리가 되기도 했다. 독일과 영국의 경우가 그랬고 미국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가 물질적인 축복을 받은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물질을 다스리는 능력과 지혜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축복을 잘 활용하지 못하면 사탄에게 당할 수 있기에 기독교를 뒤따라오는 물질에 복음의 진리가 묻히도록 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풍성하게 쓰라고 주신 것이다.
왜 번창한 물질문명이 오히려 기독교를 약화시키는가? 물질적인 축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축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한 가지 요소가 바로 ‘물질적인 헌신’이다. 물질적인 축복으로 ‘보신’에만 매달리면 그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없지만 물질적인 축복으로 ‘헌신’하면 그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이 된다.
물질은 육신 문제에서는 매우 유용해도 영혼 문제에서는 우는 사자의 잔인한 아가리가 될 수 있다. 물질이 많은 것 자체가 복은 아니다. 물질을 영혼의 문제를 위해 많이 쓰는 것이 복이다. 부를 거부하지 말라. 다만 자신의 부를 영혼 문제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멋지게 쓰라. 부를 이용하지 못하면 부에게 이용당한다.
여름철에 보면 불나방들이 가로등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다가 가로등에 부딪쳐 그 밑에는 많은 불나방들이 떨어져 고통 중에 신음하다가 죽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불나방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과 함께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빛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다가 죽기에 그런 무의미한 죽음조차도 위대해 보이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복’만 좋아하고 ‘예수님의 뜻’은 거절한다면 얼마나 저급한 삶인가? 성도란 이름을 가졌다면 물질적인 헌신은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예수님의 복’을 접하고 뜨거워졌다가 ‘예수님의 뜻’을 접하고 식어지는 양철냄비 교인이 되지 말라. 꾸준한 돌솥 신앙인이 되라. 불 위에서 금방 뜨거워졌다가 땅에 내려놓으면 금방 식어버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2017.10.20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