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높이를 맞춘 사랑
성육신의 사랑이 도전하는 삶의 중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인생은 달과 같습니다. 보름달일 때 겸손하십시오. 곧 초승달이 됩니다. 반면에 초승달로 있을 때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곧 보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초승달임을 인정하면 곧 보름달의 축복이 주어지지만 자신이 보름달임을 주장하면 곧 초승달의 처지가 됩니다. 결국 축복을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이 겸손입니다.
또한 성육신의 사랑이 도전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눈높이는 맞춘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2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은 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성육신’입니다. ‘말씀’과 ‘성육신’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말씀’을 통해 ‘주님과의 소통(진리의 깨달음)’을 이뤘으면 ‘성육신’을 통해 ‘이웃과의 소통(은혜로운 성육신의 나눔)’도 이뤄야 합니다.
누가 대화를 요청하면 성육신의 대화로 받고 진리의 말씀만 내세워 설교하지 마십시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항상 진리를 내세워 평상시에도 설교하려고 하면 권위가 생기는 것 같지만 상대방은 마음 문을 닫고 결국 권위를 잃습니다. 목회자는 강단에서만 설교하고, 강단을 내려오면 성육신의 대화 모드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그처럼 은혜와 진리가 겸비되어야 양떼들도 행복해집니다.
말씀도 중요하지만 말씀의 소통도 중요합니다. 진리는 ‘몸’을 입어야 참된 진리이고 영성도 ‘몸’을 입어야 참된 영성입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게 여기는 이원론적 영성은 신비주의나 금욕주의로 흘러서 영혼을 망칩니다. 예수님은 몸을 입고 오셨고, 몸으로 부활하셨고, 성령님은 지금도 몸을 성전으로 삼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몸도 소중합니다.
사랑할 때 마음으로 깊이 사랑할 수도 있지만 몸과 시간까지 드려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처럼 몸을 소중히 여기고 구체적으로 몸을 섬겨주는 성육신의 영성이 참된 영성입니다. 행복한 가정과 교회를 만드는 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언어와 삶을 성육신의 언어와 삶으로 바꾸면 행복이 주어집니다. 행복한 영혼을 만드는 다른 비결도 없습니다. 성육신의 영성을 가지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눈높이를 맞추며 ‘몸’까지 드리려고 할 때 행복이 이웃에게 전해지기 전에 자신 안에 행복이 충만해집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