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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인물을 만든다 (이사야 37장 1-3절)
작성자 미션퍼블릭 등록일 2017-12-29
이사야 37장 1-3절
1.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2.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 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고통이 인물을 만든다 (이사야 37장 1-3절)
 < 고통이 인물을 만든다 >
   
  인생길에는 굴복의 길과 극복의 길이 있다. 고독에 굴복하면 불안이 끊이지 않지만 고독을 극복하면 힘든 짐도 질 수 있는 튼튼한 어깨가 생긴다. 실패에 굴복하면 탈진과 염려에 젖어들지만 실패를 극복하면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승리로 변화된다. 고난에 굴복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지만 고난을 극복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극복의 길이 굴복의 길보다 낫다.
   
  무수한 사건을 통해 굴복의 길과 극복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극복의 길을 선택하라. 어떤 사람은 극복의 길이 좋은 줄 알면서도 의지가 부족해 굴복의 길을 택한다.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굴복의 길을 가지만 다음번에는 극복의 길을 가겠다고 미룬다. 오늘의 굴복은 내일의 굴복을 낳다가 끊임없는 굴복을 낳고 오늘의 극복은 내일의 극복을 낳다가 끊임없는 극복을 낳기에 지금 당장 무조건적인 극복의 길로 들어서라.
   
  어떤 사람은 굴복의 길로 가는 자기를 변호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아십니까? 얼마나 연단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앞서간 신앙 선배들처럼 어려움을 당했는가? 우리가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지만 앞서간 성경 인물들처럼 오래 기다렸는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가 당하는 것 이상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위대한 일을 성취했다.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한다지만 남들도 지금 비슷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 고난이란 위대한 선생은 유감스럽게도 내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내 고난이 남의 고난보다 클 것이라는 생각에만 빠져들지 말고 내 고난은 많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음을 깨달고 당장 고난을 극복하는 길로 나서서 용기 있게 그 길을 걸어가라.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실천에서 생기고 위대한 실천은 위대한 생각에서 온다.
   
  위대한 생각은 어디서 생기는가? 많은 고통의 나날로 기경된 마음의 터전에서 생긴다. 고통이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 베토벤이 위대한 악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청각 장애의 고통을 극복하고 불후의 명곡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거든 “고통이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는 말을 늘 기억하고 고통의 존재 이유를 긍정하면서 고통스런 순간을 성공의 기회로 만들라. 난관, 고난, 역경, 고통은 성공의 기회일 뿐 좌절의 기회가 아니다.
   
  < 하나 되기를 힘쓰라 >
   
  유다 히스기야 왕 때 당대의 강대국인 앗수르 왕 산헤립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다. 그는 많은 성들을 빼앗고 유다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랍사게 장군을 통해 온갖 조롱을 퍼부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히스기야 왕은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3절).” 산모가 해산하지 않으면 산모도 죽고 어린아이도 죽는다. 그것을 알면서도 해산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쁨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히스기야 왕은 사절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화려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갔다(1절). 철저한 회개를 상징하는 행위다. 히스기야 왕이 그렇게 하자 히스기야를 따르던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똑같이 굵은 베옷을 입었다(2절). 그런 회개의 일치, 즉 공동체적인 회개가 힘든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가정이나 교회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하나 되기에 힘쓰라.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는가? 세상적인 힘을 앞세우기보다 진실과 정의를 앞세워 하나 되려고 해야 한다.
   
  영화 <대부>를 보면 마피아 두목 7명이 만나 서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들은 각자의 손가락 하나씩을 깨물어 그 피를 컵에 받아 섞고 돌아가면서 그 피를 마셨다. 장엄한 의식이다. 그렇게 피로 뭉쳐서 절대 싸우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결국 사소한 일로 서로 싸우고 죽인다. 왜 그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는가? 폭력과 불의는 사람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 되자.”고 외치고 독재자들은 더욱 그렇게 외치지만 진실과 정의가 없으면 하나 되지 못한다.
   
  야합과 화합은 다르다. 야합은 내 이익을 위해 하나 되자고 하는 것이고 화합은 내 이익을 희생하고 하나 되자고 하는 것이다. 절망적인 순간에 야합하면 결국 절망으로 끝나지만 그때 화합하면 절망이 끝난다. 교활한 두더지는 맹수의 공격을 피해 예비로 몸을 숨길 굴을 세 개 판다. 그처럼 계산적인 마음을 가지고 여기저기 붙으면 오히려 결말이 좋지 않게 된다.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끝까지 추구해야 할 것은 단계적인 전술이나 그랜드플랜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를 앞세워 하나 되려는 마음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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