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역전은 늘 가능하다 (이사야 37장 21-38절)
< 역사는 사람을 찾는다 >
결국 이사야가 전한 말씀대로 밤새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자 시체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36절). 그런 기적적인 역사로 전의를 상실한 산헤립은 비참한 모습으로 귀국해서 니느웨에 거하다가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 그의 두 아들에 의해 칼로 살해당했다(37-38절). 이 장면을 보면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맷돌은 조용히 돌아가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면 그 맷돌에 깔려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히스토리(history)는 히스 스토리(His story)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면 하나님과 역사 앞에 겸손하게 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지만 역사 속에서 사람이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 존재한 사람들은 로봇이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행동하고 결정했다. 그래도 여전히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유대 인권운동가인 헷셀은 “역사는 악몽이다.”라고 했다. 수많은 전쟁을 통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눈물과 공포를 목격했으면서도 왜 인류는 동일한 전쟁 역사를 되풀이하는가? 하나님을 인생과 역사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이 최종 심판자가 되려고 하면 역사가 악몽이 된다.
공동체의 역사적인 존재 의의는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해하고 이루려는 헌신된 사람을 얼마나 배출하느냐?”에 달려있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은 공동체가 소망이 있고 하나님은 그 공동체를 통해 절망 중에 희망을 만들어내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섣부르게 낙관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라. 하나님 중심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내일을 준비하라. 말도 씨가 되지만 준비하는 삶은 더욱 씨가 된다. 보수적인 제사장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좋은 전통을 살려 나가는 삶과 개혁적인 예언자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좋은 변화를 선도해 나가는 삶을 겸비하라. 좋은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기려면 모세의 리더십과 아론의 리더십이 다 필요하고 야긴의 기둥과 보아스의 기둥이 다 필요하다.
지금도 역사는 사람을 찾는다. 예루살렘에 남아 사역하는 베드로의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도 찾고 땅끝까지 나아가 사역하는 바울의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도 찾는다. 연로함과 연소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 앞에 겸허한 것이 중요하다.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겸손히 쓰임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 누가 인생 역전을 통해 최종 승리를 얻는가? 하나님 중심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역사의 부름에 응답하며 살기를 힘쓰는 사람이다.
왜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가? “교회 자체로서 얼마나 커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훗날 그 교회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이 교회의 제일 중요한 역사적인 존재 이유다. 그런 역사적인 교회를 통해 역사적인 인물이 나오면 역사는 더 이상 악몽이 아닌 소망이 된다.<2018.2.13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