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에 미혹되지 말라 (이사야 56장 9-12절)
<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 >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에 힘쓰라. 다만 하나님의 음성을 받았다고 수시로 내세우는 사람의 말은 지혜롭게 분별해 들으라. 거짓 목자를 따르면 비참해지고 불행해진다. 목자는 짐승과 같은 악한 존재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려고 할 때 백성이 삼켜지지 않도록 파수를 잘 서야 한다. 그러나 거짓 목자는 맹인처럼 파수를 잘 서지 못하고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처럼 대적이 공격해도 짖을 줄을 모르면서 꿈꾸는 것과 누워 있는 것과 잠자는 것만 좋아한다(9-10절).
또한 거짓 목자는 개처럼 심한 탐욕을 가지고 만족할 줄 몰라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길로만 가려고 하고 매일 술판을 벌이고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한다(11-12절). 간단하게 말하면 거짓 목자는 ‘사명이 없는 삶, 게으른 삶, 탐욕적인 삶, 유흥적인 삶’을 추구한다. 그런 거짓 목자를 멀리하는 길이 영혼이 사는 길이다. 양떼 곁에 늑대가 노리고 있듯이 성도 곁에 거짓 목자도 노리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그처럼 거짓 목자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낙심해서 교회를 멀리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분별력을 키우라.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더불어 뱀 같은 지혜로움도 필요하다. 말씀을 잘 이해하고 영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으면 자기 영혼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사람의 내면을 알기 힘든 상태에서 거짓 목자를 어떻게 잘 구분해 멀리하는가? 그 일은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부터 ‘사명이 없는 삶, 게으른 삶, 탐욕적인 삶, 유흥적인 삶’을 멀리하면 된다. 복된 성도는 복된 목자를 만나고 거짓 성도는 거짓 목자를 만난다. 이런 격언이 있다. “당신이 사귀는 친구를 보여 달라. 당신의 사람됨은 그를 통해 나타난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이 따르는 목자를 보여 달라. 당신의 성도됨은 그를 통해 나타난다.” 고통과 불행은 대개 거짓 목자와 거짓 양떼의 합작품이고 기복적인 목자와 기복적인 양떼의 합작품이다. 거짓된 양떼에게 참된 목자가 어울리겠는가? 서로가 불편하다. 기복적인 양떼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참된 목자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겠는가? 그런 말씀에는 별로 감동하지 않기에 예수님은 말씀했다.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않았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얘야!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절실한 소원이다. 좋은 목자를 분별해 추구하고 좋은 성도를 분별해 어울리려는 것도 차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실한 소원이다. 선한 목자를 원하면 목사와의 관계를 우정 관계로 맺지 말고 은혜 관계로 맺고 자기상황(context)보다는 성경(text)에 더 관심을 두라. 또한 목회자의 미완성을 인정하고 그를 너무 의지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고 무엇보다 성경을 가까이하라.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다. 풍성한 지식이 없으면 풍성한 삶도 없다. 외형을 내세우면 하나님이 모습을 감춰서 세상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향기를 느끼지 못한다. 은밀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거룩한 매개체가 되라. 외형과 현상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열정을 버리고 바른 말씀 안에서 자신을 깎고 다듬는 열정을 가지면서 선한 성도의 길을 고수하라. 그러면 선한 목자와 마음이 통하고 그의 말씀이 심령에 쏙쏙 꽂히면서 결국 그와 하나되는 은혜를 입는다.<2018.4.27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