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으로 사는 길(2) (이사야 60장 1-3절)
참된 믿음은 사랑을 낳는다. 믿음보다 사랑이 더 소중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묻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믿음도 소중하지만 더 깊은 믿음의 기초는 사랑이란 암시다. 요새 왜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었는가?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가볍게 하고 사랑이란 이름을 빌려 잘못된 행동을 하고 심지어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어 괴롭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는 자식 사랑이 지나쳐서 자녀가 겪어야 할 정당한 고난까지 면제하려고 한다. 심지어 부정입학까지 시도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식이 때로 방황하고 실패해도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큰 울타리를 친 상태에서 스스로 문제를 극복하게 하라. 전능하신 하나님도 원대한 뜻과 목적을 가지고 때로는 사랑하는 자녀가 혼자 경험하고 깨닫도록 방황하게 내버려두신다. 그러면서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신다. 방황하는 모습은 가슴 아프지만 방황의 여지까지 철저히 틀어막는 것은 구속이다.
한 주인이 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우유가 좋다는 말을 듣고 개의 머리를 잡고 우유를 강제로 먹였다. 개가 싫다고 고개를 흔들어도 주인은 자기 사랑을 몰라주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개의 머리를 꼭 붙잡고 우유를 먹였다. 그렇게 실랑이하다가 우유 컵이 바닥에 떨어져 우유가 사방에 흩어졌다. 조금 후에 보니까 개가 바닥에 흩어진 우유를 핥아먹고 있었다. 개가 싫어했던 것은 ‘우유’가 아니라 ‘우유를 먹이는 방법’이었다.
사랑이 구속이 되지 않도록 사랑하는 방법에서도 사려가 깊게 하라. 사랑하는 방법이 틀리면 구속이 된다. 부모의 사랑 중에는 그런 사랑이 많다. 한 학원 선생은 학생을 무섭게 다루면서 학원에서 밤 12시까지 붙잡아 공부시켰다. 어느 날 그 선생이 자기 인성이 망가질 것 같다면서 학원을 그만두었다. 자기도 학생을 친구처럼 잘 대해주고 싶은데 부모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원을 끊겠다고 해서 무섭게 학생을 몰아댄 것이다. 부모의 잘못된 집착이 문제다.
어떤 부모는 자녀의 성적에는 매달리면서 자녀가 공공장소에서 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고 남이 그것을 제지하면 “왜 내 아이 기를 죽여요?”라고 한다. 질서 의식과 남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는 것은 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자녀의 기가 살면 그 자녀는 점차 사회로부터 외면된다. 바르고 현명한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주변을 밝게 만들어야 세상도 달라진다.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은 모두 달라졌다. 베드로와 요한도 달라졌고 세리와 창녀도 달라졌다. 심지어 예수님이 계셨던 장소인 나사렛이나 갈릴리도 달라졌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세상에 빛을 뿌리라. 세상을 원망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어두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명’과 ‘사랑’을 앞세워 사는 사람이다. 좋은 일에 참여하면서 작은 빛을 뿌리고 자기를 희생해 사랑을 실천하면 그때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나의 작은 빛과 너의 작은 빛이 모이면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밝아진다.<2018.5.8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