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중심적인 믿음(2) (신명기 6장 1-9절)
말씀은 기도의 산물이다. 기도 없이는 좋은 말씀이 빚어지기 힘들다. 말씀 사역자에게 기도하는 삶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남의 눈을 의식해 예배당에 오래 앉아 있는 것만이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남이 인정할 만큼 오래 기도하고 남의 기도가 끝날 때를 기다려 내가 기필코 ‘끝내기 기도’를 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영적으로 불순한 마음일 수 있다.
가끔 어떤 성도는 아침 8시까지 기도한다. 그때 끝내기 기도를 좋아하는 목회자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 것이다. “아니! 왜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하지? 빨리 기도를 마치고 가야 나도 기도를 마칠 거 아냐.” 얼마나 잘못된 모습인가? 기도 많이 하는 것이 과시 수단이 되면 안 된다. 진실하고 깨끗한 기도자는 기도를 많이 할수록 기도한다는 소리를 오히려 안 한다. 하나님은 예배당에서 오래 기도하는 것만 기뻐하지는 않으신다.
한 신랑이 신부를 지극히 사랑해서 신부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고 특별히 이불 안에서 도란도란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신부도 처음에는 그런 신랑이 좋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몇 달이 지나도 전혀 일하지 않고 매일 이불 안에 있으면서 신부가 이불 속으로 임재해주기만을 바라면 좋아하겠는가? 그때 신부의 눈에는 신랑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기보다 한심하게 보일 것이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이불을 걷어차고 소리칠 것이다. “아이고! 내가 못살아. 이 무책임한 신랑아! 사랑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일 좀 해.”
신랑이 자기 인생과 가정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맨날 이불 안에 있으면서 아내가 이불 속으로 임재해주기만을 바라는 이원론적 생활태도를 가지면 그런 모습을 보고 살아야 할 아내는 한숨만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이불 속에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멀어진다. 책임적인 신랑은 어떻게 하는가? 아침이 되면 이불을 걷고 나가서 힘써 일하며 재화를 창출해 가정을 돌보려고 한다. 그것이 진짜 신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때 신랑의 몸은 일터에 있어서 신부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일원론적인 삶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하겠다고 맨날 기도 굴에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기도에 몰입하려고 일정 기간은 그렇게 해도 되지만 1년 내내 기도 굴에서만 지내면 하나님도 속이 많이 상하셔서 “너 언제 일하러 이곳을 떠날래?”라고 하실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이원론적인 태도를 버리라. 이원론적인 믿음은 가장 경건한 모습 같지만 가장 불경건한 모습이 될 수 있다.<2018.9.5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