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4가지 삶 (요한복음 1장 29-34절)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증거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님의 위에 임한 장면은 은혜의 표징도 필요함을 교훈하고 증거자로 살려면 성령충만해야 함을 교훈한다. 성령충만을 오해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기적, 능력, 은사가 나타나고 예언하는 삶을 성령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성령충만한 삶은 그 이상이다. 성령충만의 특징은 3가지 삶으로 나타난다.
첫째, 희생하는 삶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29절). 그 말을 할 때 구약시대의 ‘유월절 어린양’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어린양의 피 흘림으로 심판과 재앙이 면제되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최대 상징이다. 사랑은 낭만적인 것보다는 희생의 값을 치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표현은 죽는 체험의 필요성을 도전한다. 십자가의 희생이 없는 성령충만은 없다.
십자가의 희생을 각오하면 삶을 덤으로 여기기에 감사가 넘친다. 예수 믿어도 문제와 고난이 있다고 여전히 불평하며 작은 고난에 쉽게 흔들리는 교인도 있다. 그러나 예수 믿었기에 그에게 있을 큰 고난이 면제된 것을 모르고 훈련용으로 조금 남겨둔 고난으로 믿음에 회의를 품지 말라.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고 적극적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성령충만이고 그처럼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결국 승리한다.
둘째, 평화로운 삶이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삶의 특징은 마음의 평화, 즉 평안이다. 믿음의 능력은 내적인 평화로 나타나야 한다. 성도의 가장 뚜렷한 삶의 특징으로서 성령충만은 “마음에 평화가 있느냐.”와 관련이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상 죄는 폭풍과 같지만 예수님은 그런 폭풍 중에서도 어린양처럼 묵묵히 평화롭게 자기 길을 가셨다.
성령님은 예수님에게 임할 때 독수리같이 임하지 않았다. 독수리는 힘, 강요, 강탈을 상징한다. 성령충만을 내세우면서 세상적인 힘을 숭배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적극성을 나타내는 것은 성령충만이 아니다. 또한 성령님은 참새같이 임하지도 않았다. 참새는 수다, 불안, 가벼움을 상징한다. 성령충만을 내세우면서 교회에서는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신앙 열정을 과시하다가 집에 와서는 금방 불안과 짜증과 분노에 빠지는 것도 성령충만이 아니다.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을 받아 위로, 평화, 온유가 삶에 넘치게 하라.
셋째, 은혜로운 삶이다. 요한복음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성령충만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증거는 ‘은혜’다. 사람은 “옳다. 그르다.”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은혜로 이해하면 모든 상황을 소화할 수 있다. 은혜받은 사람은 남의 형편과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하기에 지혜롭게 행한다. 지혜는 지식에 은혜가 더해진 것이기에 지혜로운 사람이 가는 곳마다 감사와 화평과 위로가 넘친다. 위로와 칭찬과 감사가 넘치는 은혜로운 사람이 가장 지혜롭고 성령충만한 사람이다.<2019.1.17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