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주는 것이다(2) (요한복음 3장 16절)
드리고 나누고 베풀면 가난뱅이가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신기하게 드리고 나누고 베풀 수 있는 능력을 넘치게 주신다. 나눔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살면서 수많은 기쁜 일 중에 주는 일과 내는 일만큼 기쁨을 주는 일은 없다. 나눔을 위해 자기 안전을 걸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 더 채워주시는 하나님임을 꼭 보여주신다.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가면 밥값을 제일 안 내는 사람 1위가 목사이고 2위가 교사이고 3위가 법조인이란 유머가 있다. 늘 대접받는 위치에 있는 삶은 복된 삶이 아니다. 서로 힘써 대접하라. 대접하는 기쁨을 빼앗긴 삶은 불행한 삶이다. 주는 기쁨과 내는 기쁨을 위해 자기 안전을 걸면서 늘 하나님 나라와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쁘게 주라.
필자가 문서선교를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돈 이상의 귀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처럼 열심히 주려고 해도 필자의 두 딸만은 어떤 선한 일을 위해서라도 죽음의 상황에 내어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이 새롭게 부딪쳐 왔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셨다. 그 무한한 사랑을 어떻게 측량하는가?
한 목회자 아들이 수술할 때 긴급히 피가 필요했다. 목회자가 헌혈을 자원하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필요한 만큼 피를 뽑으세요. 제 생명이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지만 제 아들만은 꼭 살려주세요.” 그처럼 아들이 살 수 있다면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으려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인데 어떻게 그 아들을 죽음의 길로 내주겠는가? 그것을 생각해볼 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측량할 길이 없다.
1994년 성탄절 전날 아침 11시에 인천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첫딸을 보고 너무나 감격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처럼 사랑하사”의 깊은 의미를 느꼈다. 당시 2년간 개척 교회를 해서 교인을 다 사랑했지만 “이처럼 사랑하사”란 정도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첫딸을 안고서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두 딸을 보면 “이처럼 사랑하사”로 표현된 그 사랑이 넘친다. 자는 모습만 봐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 두 딸을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해서라도 죽음에 내어주기는 힘들 것 같다.
사람은 도저히 못하는 일로서 하나님은 죄인을 살리려고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은 하늘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주며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도 줄 수는 있지만 주는 것이 없이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면 나도 나의 소중한 것을 누군가를 위해 줄 줄 알아야 한다.<2019.1.31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