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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호
작성자 요삼일육선교회 등록일 2019-02-14
요한복음 6-10장
3/01(금) 요한복음(48) 리더에게 필요한 4대 요소 (요 6:32-40)
3/02(토) 요한복음(49) 진리를 따라 살라(1) (요 6:41-59)

3/04(월) 요한복음(50) 진리를 따라 살라(2) (요 6:41-59)
3/05(화) 요한복음(51) 창조적인 소수가 되라(1) (요 6:60-71)
3/06(수) 요한복음(52) 창조적인 소수가 되라(2) (요 6:60-71)
3/07(목) 요한복음(53) 믿음에 대한 3대 정의 (요 7:1-9)
3/08(금) 요한복음(54) 인생에서 중요한 것 3가지 (요 7:10-24)
3/09(토) 요한복음(55) 부르심에 합당한 삶 (요 7:25-36)

3/11(월) 요한복음(56)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라 (요 7:37-39)
3/12(화) 요한복음(57) 마음과 귀를 열라 (요 7:40-53)
3/13(수) 요한복음(58) 용서의 능력을 얻는 길(1) (요 8:1-11)
3/14(목) 요한복음(59) 용서의 능력을 얻는 길(2) (요 8:1-11)
3/15(금) 요한복음(60) 판단과 관련된 3대 교훈 (요 8:12-20)
3/16(토) 요한복음(61) 복된 삶을 위한 4대 의식(1) (요 8:21-30)

3/18(월) 요한복음(62) 복된 삶을 위한 4대 의식(2) (요 8:21-30)
3/19(화) 요한복음(63) 진리 안에서의 자유 (요 8:31-41)
3/20(수) 요한복음(64) 자유에 대한 5대 정의 (요 8:42-47)
3/21(목) 요한복음(65) 말과 관련된 4대 자세 (요 8:48-59)
3/22(금) 요한복음(66)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1) (요 9:1-12)
3/23(토) 요한복음(67)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2) (요 9:1-12)

3/25(월) 요한복음(68)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1) (요 9:13-34)
3/26(화) 요한복음(69)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2) (요 9:13-34)
3/27(수) 요한복음(70) 하나님만 바라보라(1) (요 9:35-41)
3/28(목) 요한복음(71) 하나님만 바라보라(2) (요 9:35-41)
3/29(금) 요한복음(72) 선한 목자에 대한 4대 정의 (요 10:1-5)
3/30(토) 요한복음(73)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 (요 10:6-10)
마중물 : 거룩함에 이르는 길
 <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라 >
   
  유명한 김밥 프랜차이즈가 있다. 그곳이 이단 단체가 운영하는 곳이란 루머를 앞세워 예전에 일부 영성주의자들이 불매운동을 벌였다. 진위 여부를 떠나 거기서 식사하지 않는 것을 거룩함이라고 여기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극단화시킨다. 더 나아가 거기서 식사하는 교인을 거룩하지 못하다고 정죄하면 더욱 극단적인 모습이 된다.
   
  한 사람이 하는 일, 관련된 일, 언어, 성격, 취미 등을 조합하면 수만 개도 넘는 삶의 형태가 나온다. 인류가 수십억 명이기에 전 지구인에게 나타날 수 있는 삶의 형태는 수십조 개도 넘는다. 그 중에 몇 개의 삶의 형태를 거룩함의 기준으로 삼아 영적인 우월감을 가지면 안 된다. 믿음 안에 있는 삶의 전반적인 모습을 보고 거룩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이지 어떤 한두 가지 삶을 실천하기에 거룩한 존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A 집사가 한 영화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그 영화 주인공이 이단 교회 신자란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그 연예인이 나오는 영화는 안 보고 옛날에 봤던 영화의 좋은 기억도 다 지우려고 했다. 죄의 흔적을 벗겨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애쓰는 삶이 거룩한 삶인가?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보고 가상하게 여기기보다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네가 벗겨내야 할 죄의 흔적이 그것뿐이겠니?”
   
  더 나아가 A 집사는 남들에게 그 연예인의 영화를 보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이 물었다. “그에게 원한이 있어요?” 그가 대답했다. “이단 신자예요.” 그러면 분별력 있는 사람은 그를 거룩하게 보기보다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본다. 거룩함을 기준으로 3종류의 사람이 있다. 거룩한 사람, 거룩하지 않은 사람,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둘째 사람과 셋째 사람 중 누가 더 정신이 병들기 쉬운가? 스스로 판단하라.
   
  문제는 A 집사가 그 연예인의 영화는 보지 않아도 거의 매일 한 커피 가맹점에 들른다는 점이다. 그 커피 가맹점은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가봤을 것이다. 그곳은 몇 가지 반기독교 사상이 있는 곳으로 소문났다. 어떤 연예인이 이단 신자라고 그의 영화까지 안 보면서 자신은 정작 그런 곳을 매일 출입하며 거기에 돈을 벌어주고 있었다. 그런 자기모순적인 모습을 무수히 노출시키는 삶이 과연 거룩한 삶인가?
   
  어떤 작곡가나 연주가는 잔잔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음악 풍을 가졌다. 그러자 한 영성 단체가 그를 뉴에이지 음악가라고 규정하고 그 음악을 안 들어야 거룩한 삶인 것처럼 주장했다. 심지어 어떤 영성주의자는 누군가의 자의적 해석을 무조건 추종해서 일부 캐럴이나 복음 송도 이단 색채가 있다면서 그 노래를 부르면 영성이 없다는 듯이 주장했다. 그런 영성주의자는 대개 이원론적인 영성주의자다. 결국 깊이 들어가 보면 자신이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왜곡하면서 남의 영성을 탓하는 셈이다.
   
  예전에 필자가 한 불교 상점을 지나다가 거기서 흘러나온 멜로디가 너무 익숙했다. 자세히 들어보니까 찬송가 39장 <주 은혜를 받으러 모인 성도들>이었다. 지금은 중국도 많이 개방되어 무서운 공산국가란 이미지가 줄었지만 17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중국 북경의 유명한 한 공원에 갔는데 거기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흘러나와 신기하게 여겼었다. 세상도 변하고 있다. 수용해야 할 것과 수호해야 할 것의 대상을 사소한 것에 맞추면 헛된 영성 자랑으로 인해 참된 영성을 잃기 쉽다.
   
  영성주의자가 김밥 프랜차이즈까지 이단 소문을 퍼뜨린 것은 그 로고가 한 이단 로고와 유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동네 김밥 집은 멀리하면서 기독교 이단 분파인 경교의 영향을 받은 모슬렘 국가에서 수입한 석유 제품은 왜 쓰는가? 왜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이나 카타르 항공 비행기를 타는가? 어떤 가게를 안 가고 어떤 음악을 안 듣는 것이 거룩함인 줄 알면 이원론적인 영성주의자의 기독교 진리 훼손 전략에 말려들기 쉽다.
   
  거룩한 태도와 거만한 태도는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거룩함을 자랑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원론적인 영성주의자처럼 거룩함을 규정해 세속적인 환경을 멀리하려면 사막이나 동굴에서 혼자 살든지 지구를 떠나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막이나 동굴에서 혼자 사는 것을 거룩하다고 하지 않는다. 거룩함을 힘써 추구하되 자기가 규정하는 어떤 특정적인 삶의 스타일을 거룩함의 기준으로 내세우지 말라.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라고 하셨다. 거짓 영성에 미혹되지 말고 세상 속에 들어가 참된 영성과 거룩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라.
   
  < 편법을 절제하라 >
   
  거룩하게 살려면 절제해야 할 것이 많다. 특히 죄의식이 없이 사용하는 편법을 잘 절제해야 한다. 레위기 10장을 보면 대제사장 아론의 장자와 차자인 나답과 아비후가 향로에 다른 불을 담아 분향했다가 여호와의 불에 삼켜져 죽는 장면이 나온다. 향로에 담아야 할 바른 불은 번제단의 불인데 나답과 아비후는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사용해 그들 편의대로 분향단의 향을 살라서 급사했다. 하나님이 때로는 정말 무섭다. 제사 형식이 조금 틀렸다고 어떻게 그렇게 무섭게 죽이시는가? 하나님은 정말 사랑의 하나님인가?
   
  성경에 묘사된 무서운 하나님을 보고 “나 시험 들었다.”고 하며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 믿음 생활에서 가끔 그런 의문이 들 때 처음에는 시험에 들지만 점차 믿음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시험은 ‘드는 것’이 아닌 ‘통과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의문 대상’이 아닌 ‘순종 대상’임을 깨닫게 된다. 간혹 하나님은 어떤 본보기 사건을 통해 메시지를 주신다. 나답과 아비후의 급사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편법으로 제사를 경솔히 드리지 말라는 메시지다. 편법은 언젠가 반드시 문제를 낳는다.
   
  한 초대형 교회 목회자는 종종 권력 친화적인 설교를 해서 예전부터 “언젠가 권력 변화가 생기면 어려워질 수 있는데.” 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정치 성향을 나타내면 안 된다. 교인 구성원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목회자는 말씀이 은혜로운 편이었기에 존중하며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최근에 편법 세습 문제로 이제까지 쌓아놓은 이미지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내려놓지 못해 생긴 추락이다.
   
  또 다른 한 초대형 교회 목회자는 많은 책을 써서 개인적인 인세 수입이 많았다. 그에 대해 누구도 “그 수입이 목사님 겁니까?”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 것이 아닌데 그도 결국 편법 세습을 한 것처럼 비춰짐으로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었다. 개척하고 성장시킨 목회자에 대한 예우로서 적절한 발언권 존중은 필요하다. 다만 그 발언권이 지나쳐 교회 총의에 반해 편법 세습을 꾀하면 이미지와 영향력은 더 나빠진다.
   
  가장 잘못된 것은 무속적이고 거짓된 방법을 사용해 영혼을 사로잡는 것이다. 어떤 치유 부흥사는 치유가 확인도 안 된 사람을 믿음으로 치유받았다면서 마이크를 대며 억지로 치유 고백을 시킨다. 그런 거짓 치유 사역자에게 순진한 사람이 거짓의 동조자가 되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인식도 못한 채 따라가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하나님은 거짓을 통해 역사하는 법이 없다. 거짓된 치유 부흥사의 기도를 받겠다고 하기보다 차라리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서 신실한 헌신을 새롭게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치유의 역사를 가져다준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치유받은 사람에게 마이크를 대는 식으로 선전하기보다 오히려 치유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다(눅 5:14). 거짓된 치유 부흥사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영혼 구원 및 영혼 변화보다 신기하고 화려한 능력을 보여주는 치유 사역에 몰려들 때가 많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 영혼과 돈을 빼앗는 거짓 치유사들의 작전이 있을 것을 예견하시고 예수님은 치유 선전을 금하라고 하셨다.
   
  자신이 영성과 능력이 있다고 선전할수록 예수님의 뜻과는 더 멀어지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는 치유가 더 멀어진다. 결국 내 영혼의 행복과 참된 치유를 위해 가장 멀리해야 할 사람은 치유의 은사와 능력을 선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자랑을 힘써 삼가되 영성과 영적인 능력에 대한 자랑은 더 삼가야 한다. 또한 리더의 능력 자랑만큼 주의해야 할 것이 팔로워의 자기 최면이다.
   
  얼마 전에 몇몇 성도가 어떤 약을 써서 머리숱이 많아진 얘기를 공통으로 해서 필자도 그날 저녁부터 그 약을 쓰기 시작했다. 3주 후에 머리숱이 많아진 것 같아서 이발하다가 이발사에게 말했다. “요새 제 머리숱이 많아졌지요?” 이발사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제까지 40년 이발했지만 머리숱이 다시 많아진 경우는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때 필자가 “저는 정말 머리숱이 많아진 것 같은데요?”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것은 자기 최면이에요.”
   
  이발사의 40년 체험이 꼭 진리는 아니다. 그래도 참고할 말로 진지하게 들으면서 “앞으로 자기 최면에 걸리지 않고 늘 객관적인 시야를 가지기에 힘쓰자.”고 새롭게 다짐했다. 가끔 보면 거짓된 믿음에 빠져 객관적인 사실을 부인하며 자기 최면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믿음은 현실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최면에서 벗어나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기도는 자기 최면보다 선견지명을 낳는다.
   
  왜 가짜 치유사의 거짓 능력 행각이 지속되는가? 팔로워가 그를 따르는 삶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그의 치유 능력은 진짜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따르기 때문이다. 거짓과 과장 선전이 잦은 이단 교주에게 자기 최면에 빠져 속는 것은 자기 영혼에 대한 무책임이다. 이단 교주가 거짓말을 잘하면 그가 내세우는 새로운 교리도 당연히 거짓이다. 자기 최면에 빠지지 않으면 명백한 거짓과 과장 선전은 금방 분별된다. 자기 최면에 빠지지 말고 바른 리더와 상식적인 성도의 말도 잘 귀담아들어야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할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길이 막힌 상황에서 최대한 길을 열려고 방법을 찾는 것은 필요하지만 불의나 불법 인상을 주는 편법은 삼가야 한다. 특히 무속적인 방법이나 거짓된 방법은 더 삼가야 한다. 왜 잘못된 방법을 쓰는가? 대개 욕심 때문이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고 욕심을 다 버릴 수도 없다. 때로는 좋은 욕심도 있다. 다만 버려야 할 욕심은 지혜롭게 잘 버리라. 남들이 지켜보고 있다. 특히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 잘 버리지 않으면 더 잃고 잘 버리면 더 얻는다.
   
  < 말과 슬픔을 절제하라 >
   
  모세는 아론에게 나답과 아비후의 급사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는 조치였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제사 방식이 조금 틀렸다고 죽이는 것도 시험에 들 일이지만 두 아들을 잃고 극심한 아픔을 겪은 아론 앞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도 시험에 들기 좋다. 어떤 사람은 아론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두 아들을 잃고 극심한 슬픔에 빠진 아론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해 천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꼭 말해야 합니까? 아무리 바른말도 3살 많은 형님 앞에서 상처에 식초를 붓는 식으로 말하면 됩니까?”
   
  의로운 생각에서 나온 매우 의로운 말 같다. 또한 아론의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말 같으니까 아론이 속으로 통쾌하게 여길 것 같다. 그러나 아론은 크게 시험에 들 수 있는 기막힌 상황에 처하고 기막힌 말을 들었어도 잠잠히 있으면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원망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의롭게 남을 대변해주는 말도 때와 상황을 가려 지혜롭게 하라. 남을 대변해주는 것이 그의 의사가 아닐 때도 많고 그를 더 곤란하게 만들 때도 많다. 내 말도 오해하기 쉬운데 남이 대신 해주는 말은 더 오해하기 쉽다. 말은 절제할수록 좋다.
   
  아론이 두 아들을 잃은 후 큰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듣고도 잠잠했기에 모세는 자기 아들이 아닌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을 통해 대제사장 가문이 유지되도록 했고 결국 아론의 가문은 신약시대까지 약 1500년간 대제사장 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난 중에 보인 아론의 잠잠했던 모습이 엄청난 가문의 복을 예비한 셈이다. 한스러운 일을 당해도 믿음 안에서 말을 절제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신다.
   
  그때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애곡을 금지시켰다. 극한 슬픔까지 극복하는 믿음의 본을 보이라는 뜻이다. 특히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기에 그때는 슬픔의 표현을 더 자제해야 했다. 그렇게 슬픔을 자제해야 자신도 죽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영적인 리더가 범죄하면 양떼에게 악영향을 미치기에 더 책임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암시다.
   
  제사장이 당한 슬픔을 매정하게 완전히 외면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제사장 가족 대신에 백성이 슬픔을 표현하라는 말이었다. 슬픔을 표현할 때는 두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여호와께서 치신 불의 심판 때문에 슬퍼하라고 했다. 개인적인 슬픈 감정으로 인해 공동체가 흔들리거나 믿음과 진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일전에 한 교회 리더의 자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회 리더의 자녀가 받는 가장 큰 상처 1순위는 부모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이고 2순위는 부모가 교회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지 못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 가운데 허덕이는 교회 리더의 자녀도 꽤 있다. 그런 자녀가 정신적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접하면 너무 슬픔에 젖어 교회 리더까지 기독교의 진리를 이렇게 바꾸어 받아들이고 싶다. “자살해도 천국 간다.” 그러나 극한 슬픔이 바른 교리까지 삼키게 하면 안 된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길에 달렸다. 자기 인생을 자신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불의의 사고가 없으면 좋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기에 필자는 가끔 자녀에게 말한다. “얘야, 내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도 너무 그 일로 인해 슬픔에 빠지지 말고 조금 슬퍼한 후에는 엄마와 함께 꿋꿋하게 잘 살아라.” 그렇게 사후처리를 잘하기가 쉽지는 않기에 미리 유언처럼 사전 교육을 해놓으면 슬픔의 극복에 큰 도움이 된다.
   
  얼마 전에 필자의 둘째 딸이 말했다. “아빠! 혹시 제가 어떤 일로 먼저 천국에 가면 사흘만 슬퍼하세요.” 너무 대견해서 필자도 대답했다. “내가 천국에 가면 너도 사흘만 슬퍼해라.” 신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표현이지만 비유적인 표현으로 천국에 먼저 가면 이 땅에 남은 가족을 최대한 지켜주기로 서로 약속했다. 그런 약속을 주고받은 기억만으로도 천국 소망이 넘치고 힘이 나서 각종 슬픔을 극복하고 남은 사람은 열심히 살 것이다. 성도는 슬픔을 잘 절제하고 과거를 잊으며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새롭게 일어서서 자기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
   
  < 바른 분별력을 기르라 >
   
  나답과 아비후 사건 후에 모세는 아론과 그의 남은 두 아들에게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제사장은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감정 표현도 자제해야 했지만 외출이나 만남도 자제해야 했다. 성도도 작은 제사장이다. 슬픈 일을 당할 때 그 일의 원인을 찾아 상담하겠다고 혹은 위로를 받겠다고 사람을 너무 찾아다니지 말라. 기본적으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인맥이 넓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맥이 넓으면 유익을 얻을 때도 있지만 잘못된 일에 연루되어 큰 낭패를 당할 때도 많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사람을 만나면 그로부터 좋지 못한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다. 또한 슬픈 일을 당해서 상처가 크면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정상적인 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지고 감성 지수도 떨어진 상태가 되기에 대화하면서 자기 상처가 깊어지고 남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도 커진다. 슬플 때는 사람과의 만남을 절제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더 많이 가지라. 하나님은 내 모든 마음을 받아주시고 최고 위로를 주실 수 있다. 사람과의 만남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더 좋은 만남을 얻는다.
   
  마지막 때는 미혹의 시대이기에 바른 분별력을 힘써 길러야 한다. 특히 영적인 리더는 양떼의 죄를 등에 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안고 양떼에게 나아가야 하기에 분별력이 더 필요하다. 거룩한 것과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을 잘 분별하라. 사람이 생각하는 거룩한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거룩하지 않을 수 있고 사람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세속적이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탐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과 거룩하게 보이려고 자기중심적인 거룩함의 기준을 만들어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거룩한 행세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다. 법만 내세우지 말고 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 뜻대로 영혼을 섬기라.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외면적인 몇 가지 삶만 내세워 나는 거룩하고 남은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거룩함을 이루려면 내게 예수님의 삶과 향기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한 삶의 핵심 실천 요소는 무수히 많다. 어떤 음악을 듣고 안 듣고, 어떤 상점을 가고 안 가고,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 주일에 식당에 가고 안 가고 등의 내적인 빈곤을 드러내는 얄팍한 모습으로 거룩함을 판별하거나 나타내지 말라. 내면이 텅 빈 존재는 자꾸만 외적인 몇 개의 자기중심적인 거룩함의 기준으로 남을 깎아내리는 이상 성향을 보인다. 그런 성향에 같이 휩쓸려 참된 거룩함에 대한 분별력을 잃으면 결국은 이단적인 영성주의자에게 영혼이 사로잡히기 쉽다.
   
  외적인 거룩함의 기준보다 오히려 남을 배려하고 안 하고, 약자를 경시하고 안 하고, 맡은 일에 책임적이고 아니고, 약속 시간을 지키고 안 지키고, 특히 절제하고 안 하고 등으로 거룩함을 판별하거나 나타내라. 특히 편법, 말, 슬픔, 만남 등을 잘 절제해서 영혼과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함으로 참된 거룩함을 이루라.
   
  2019년 2월 13일 (월새기 영어 유튜브 D-200/ 월새기 영어판 D-931)
  이한규 (요삼일육선교회 대표/ 월간새벽기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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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8 주일설교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복 (마가복음 10장 28-31절) 요삼일육선교회 116 2024.04.15
10777 온라인새벽기도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복 (마가복음 10장 28-31절) 요삼일육선교회 131 2024.04.15
10776 이달의 월새기 백 배의 복을 얻는 길(2) (마가복음 4장 1-9절) 요삼일육선교회 80 2024.04.15
10775 이달의 월새기 백 배의 복을 얻는 길(1) (마가복음 4장 1-9절) 요삼일육선교회 91 2024.04.13
10774 온라인새벽기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 (시편 47편 1-9절) 요삼일육선교회 110 2024.04.12
10773 이달의 월새기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2) (마가복음 3장 31-35절) 요삼일육선교회 92 2024.04.12
10772 담안편지 담안편지(898) - 나가라 하실 때 나가면 되겠지 하고 있습니다 요삼일육선교회 67 2024.04.12
10771 이달의 월새기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1) (마가복음 3장 31-35절) 요삼일육선교회 86 2024.04.11
10770 온라인새벽기도 하나님을 앞서지 말라 (시편 46편 8-11절) 요삼일육선교회 85 2024.04.11
10769 온라인새벽기도 공휴일 요삼일육선교회 75 2024.04.10
10768 이달의 월새기 성령 충만의 5대 증표(2) (마가복음 3장 20-30절) 요삼일육선교회 831 2024.04.10
10767 온라인새벽기도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라 (시편 45편 10-15절) 요삼일육선교회 116 2024.04.09
10766 이달의 월새기 성령 충만의 5대 증표(1) (마가복음 3장 20-30절) 요삼일육선교회 102 2024.04.09
10765 주일설교 예수님을 잘 아는 길 (마가복음 8장 27-38절) 요삼일육선교회 112 2024.04.08
10764 온라인새벽기도 예수님을 잘 아는 길 (마가복음 8장 27-38절) 요삼일육선교회 91 2024.04.08
10763 이달의 월새기 끝까지 제자답게 살라 (마가복음 3장 13-19절) 요삼일육선교회 74 2024.04.08
10762 대표기도 주일예배 대표기도 (허장도집사) 요삼일육선교회 69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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