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귀를 열라 (요한복음 7장 40-53절)
기독교의 2대 진리가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이다.”라는 진리와 요한복음 1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진리다. 즉 ‘말씀과 성육신’이 기독교의 2대 진리다. 말씀이란 사실(fact)도 중요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incarnation)도 중요하다. 메시지(message)도 중요하지만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소통(communication)도 중요하다. 말씀만 선포하고 소통을 거부해서 내가 말한 진리가 삶 속에 전달되지 못해 “영성이 깊다.”는 말이 “꽉 막혔다.”는 말처럼 사용되지 않게 하라.
어느 날 한 성도가 신령한 집사에게 말했다. “집사님! 그 일을 하는 것은 제가 부족하다고 느끼기에 좀 더 기도해볼게요.” 그 신령한 집사가 신령하게 대답했다. “성도님! 자기 느낌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 뜻대로 사세요.” 남이 사실(fact)을 겸손하게 말할 때 소통하려고 하지 않고 설교조로 말하는 것은 신령함이 아닌 주책이고 영성의 표시가 아닌 동문서답이다. 왜 그런 동문서답이 나오는가? 영적인 교만 때문이다.
누군가가 “저는 자본이 없이 그 사업을 못할 것 같아요.”라고 하면 그 신령한 집사는 다짜고짜 말했다. “아니, 믿음도 없어요?” 그러면 소통이 안 된다. 한 목사가 팩트를 말했다. “교회성장에는 여러 요소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한 신령한 목사가 동문서답을 했다. “교회성장이 진리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소통이 안 된다.
‘진리’를 알아도 ‘성육신’을 모르면 영성이 깊은 것이 아니라 주책을 부리는 것이다. 대화를 걸어오면 대화로 받고 설교로 받지 말라. 성육신의 원리를 모르는 영성주의자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또 설교하네.”라는 말이다. 요즘은 “설교하네.”라는 말이 “위선자들이 잔소리를 하네.”라는 말처럼 쓰일 때가 많다. 무도한 충고를 삼가라. 어떤 일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소통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높은 사람처럼 충고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남용하는 신령한 자가 되기 전에 성육신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라. 말씀의 성육신 과정도 없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은 많은 상처를 낳는다. 해는 생명력도 주지만 일사병으로 죽음도 준다. 충고도 생명을 주려고 하는 것이지만 성육신의 원리에 무지한 사람의 충고는 오히려 생명을 죽일 수 있다. 적절한 충고는 유익하지만 잘못된 충고는 어떤 마귀도 해낼 수 없는 큰 상처와 손실을 낳는다.
‘말씀’은 있지만 ‘성육신’이 없어서 말씀으로 휘두르는 칼이 오히려 영혼에 상처를 입히면 그것은 영특한 마귀를 비굴하게 모방하는 모습처럼 된다. 참된 영성을 가지면 “어떻게 내가 신령하게 보일까?”에 관심이 없고 “어떻게 내가 저 영혼과 깊은 소통을 이룰까?”에 더 관심이 생긴다. 늘 마음과 귀를 열고 ‘말씀의 진리’와 ‘말씀의 성육신’을 함께 구비한 균형 잡힌 믿음으로 나도 행복을 얻고 남에게도 기쁨을 주며 살라.<2019.3.12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