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1) (요한복음 9장 13-34절)
예수님이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율법주의에 치우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안식일은 일을 무조건 금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이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겨 있지만 율법에 치우친 율법주의는 사람의 악한 뜻이 숨겨져 있다. 율법주의는 사람 뜻을 따라 만든 사람의 법을 하나님의 법처럼 미혹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 율법을 내세워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정죄한다. 영혼을 살리려고 주어진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삼는 율법주의로 흐르면 결국 영혼을 죽인다.
한 아내가 믿음이 깊어지면서 남편과의 잠자리를 멀리했다. 하나님 안에서의 결혼생활과 부부생활은 신성한 것인데 스스로 만든 양심의 법으로 죄의식을 느껴 심적인 고통을 당하고 상대에게도 상처를 주면 안 된다. 자기 영성을 나타내려고 율법을 어렵게 만들고 그것을 지켜야 참된 신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거나 생각하게 하면 안 된다.
왜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눈을 떴는데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그를 협박하며 신앙의 싹을 자르려고 했는가? 교만한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율법주의는 자기 믿음과 영성 과시 수단이기에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를 감추고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한다. 겸손하게 사랑의 율법을 실천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다.
물론 율법주의로 인해 율법 자체를 경시하면 안 된다. 유대인들은 대변의 처리 문제까지 세세하게 율법으로 정했다. 3500년 전부터 그런 율법을 지켜온 유대인에게 고대 이방인들은 개처럼 보였을 것이다. 인도 시골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아무 데서나 대변을 보기에 사방에 대변 천지다. 고대에는 청결의식, 도덕의식, 윤리의식이 더 낮았을 것이다. 그런 이방인의 모습이 율법대로 정결하게 살던 유대인에게는 천하게 보였을 것이다.
문제는 율법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며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이었다. 결국 율법 안에 갇혀 진취성을 잃고 소국으로 머물다가 멸망했다. 그러나 거의 2000년 만에 나라를 회복했다. 그런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율법과 기록을 통해 그들의 역사성과 정체성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나라를 망하게도 했지만 회복하게도 했다. 율법 자체는 소중한 것이다. 율법을 지혜롭게 잘 준수하면 진취성과 창조성도 생긴다.
유대인 중 노벨상 수상자가 많다는 사실은 그들의 진취성과 창조성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자유와 진취성과 창조성은 무법과 무질서를 통해 커지지 않는다. 율법을 통해 기본적인 질서의식과 안정성을 확보한 후 그 기초 위에서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때 더 좋은 것을 얻게 된다. 과거의 토대를 지혜롭게 활용하면 새로운 것의 창조도 쉽다. 과거를 깨뜨리고 부정하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듯이 율법을 깨뜨리고 부정하면 은혜의 탑도 쌓이지 않는다. 율법을 중시하되 율법에 치우치지는 말라.<2019.3.25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