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요한복음 12장 9-19절)
천사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한다. 예수님은 충분한 무력이 있었어도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하나님은 평화 추구자를 사용하신다. 사람들은 힘이 평화를 준다고 믿지만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그런 믿음이 틀린 것임을 잘 보여준다. 평화의 힘이 무력의 힘보다 크다. 참된 평화는 무력보다 사랑과 용서를 추구할 때 주어진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평화가 넘치고 소외와 상처도 없다. 예수님은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를 더 아끼시고 살피셨다.
사람을 밀어내는 삶보다 껴안는 삶에 익숙해지라. 그때 예수님의 품에 안기고 그로 인해 넘치는 생명력이 나타나고 공동체에 생명의 꽃이 핀다. 의롭게 살라는 말이 불의한 사람을 배척하라는 말은 아니다. 선한 목적을 따라 잠시 배제해도 배척하지는 말라. 배제할 때도 기본적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품으라. 빛 된 삶을 살라는 말이 어둠에 속한 사람을 말살하라는 말은 아니다. 선한 목적을 따라 잠시 멀리해도 말살하지는 말라. 멀리할 때도 기본적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품으라.
사람은 다 부족하다.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라.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배척하고 싶지만 그래서 그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배척은 상처를 낳고 평화를 깨고 선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만 생각하고 깨닫는 기회를 주는 선한 배제는 평화를 깨지 않고 선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사람의 인격 자체를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말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하라.
인간관계를 하면 실망될 때도 있고 인간사회를 보면 실망스런 모습이 보일 때도 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라.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내 현실에 모시라. 예수님은 지금도 베들레헴 구유와 같은 마음을 찾으신다.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예수님이 오실 수 없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 전에 내 마음의 어둠을 탓하고 먼저 평화의 빛으로 내 마음을 밝히라.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평화를 앞서 추구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무력은 마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힘으로 자라지 않는다. 무력이 평화를 주고 힘을 정의로 여기면서 사랑을 통한 평화의 비전을 외면했기에 유대인들은 평화의 왕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비폭력에 의한 평화 추구자들이 많은 시련과 핍박을 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평화로운 나귀가 아닌 야비한 늑대로 살아야 성공하고 사랑과 섬김과 선교와 구제는 약자의 윤리처럼 여긴다. 큰 오해다.
왜 삯꾼 목자가 생기는가? 힘을 정의로 여기는 세상 흐름을 따르기 때문이다. 삯꾼 목자는 양을 잃고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길 잃은 양을 찾지도 않고 상처받은 양을 고쳐주지도 않고 양을 먹이지 않아 야위게 하고 살진 양을 골라 잡아먹는다(슥 11:16). 그런 삯꾼 목자가 더욱 힘을 가지기에 “힘이 정의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 거짓된 정의를 좇아 사람들이 힘을 추구하지만 사실상 세상을 이끄는 참된 힘은 사랑이다.
힘을 숭상하는 목자는 양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우지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으라.”고 하지 않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강함보다 약함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함을 알려주는 최대의 역사적인 사건이다. 스가랴 말씀처럼 힘을 숭상하는 목자는 재앙이 임박한 목자로서 곧 칼이 그 팔과 눈을 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늘 평화를 추구하는 참된 리더의 꿈을 품고 평안 가운데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라.<2019.4.10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