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버리라(1) (요한복음 13장 21-30절)
제자의 삶을 결심할 때 가룟 유다처럼 결심하면 배반의 길로 가기 쉽다. 리더의 능력과 인격과 비전을 신뢰하면 “내가 저분을 모시고 따르리라.”고 결심하고 순전하게 따라야지 “내가 저분을 모시고 세상을 바꾸리라.”고 하면서 처음부터 자기 욕망을 투영한 상태로 따르면 언젠가는 배반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다른 11명의 제자는 순전하게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따르리라.”고 결심하고 따랐기에 예수님의 길과 태도와 활동이 자기 생각에 이해되지 않아도 쉽게 의문을 품지 않고 예수님의 사역이 기대만큼 커지지 않아도 그 결심이 변하지 않았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자기 욕망을 투영해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세상을 바꾸리라.”고 결심하고 따랐기에 예수님의 길과 태도와 활동이 자기 생각에 이해되지 않으면 금방 의문을 품었다. “왜 예수님이 저렇게 행동하실까? 왜 공동체 성장에는 관심이 없을까? 힘이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그는 개인적인 욕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마음도 조급했다. 또한 예수님이 엄청난 능력을 활용해 큰 부흥의 바람을 일으키지 않고 정적으로 활동하니까 답답했다. “저러면 어떻게 세상을 바꾸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무리가 몰려들 때 잡지 않고 이상한 말씀으로 오히려 무리를 떠나가게 하면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점점 그의 생각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지나도 예수님의 공동체는 외적으로 별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며칠 전에는 속상한 일을 목격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환영했다. 그 기회를 잘 살려 세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수님은 다음날 성전에 들어가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외치며 성전 청소를 해서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미움도 받고 군중의 마음도 멀어지게 해서 그는 더 실망했다. “저렇게 입바른 말씀만 하니까 맨날 12명 수준에서 머물지. 우리 12명으로 무슨 희망이 있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의 희망은 점차 절망으로 변해갔다. 게다가 외형적인 성장이 없자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과 비전과 사역 방식이 다 마음에 안 들었다. 결국 배반의 길로 떠났다. 예수님을 순전히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이용해 자기 욕망을 이루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는 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존재가 되었지만 외형적인 성장도 없이 고작 12명의 제자만 남기고 돌아가신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변화를 일으키셨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외형적인 성장이 없는 것에 실망해 예수님의 공동체에서 이탈해 비극적인 인생이 된 것이다. 그의 계산은 오산이었고 그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가룟 유다의 눈에는 12명의 볼품없는 소수의 제자만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 소수의 제자를 통해 천년영향력을 넘어 영원한 영향력을 계산하고 계획하셨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바른길에서 인내해야 불행과 수치와 비극을 막을 수 있다.<2019.4.19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