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능력 2가지 (요한복음 18장 1-11절)
겸손에는 상대적 겸손과 절대적 겸손이 있다. 상대적 겸손은 돈과 권세와 실력이 있는 사람 앞에서 겸손하다가 약자 앞에서는 겸손을 잃는 것이다. 반면에 절대적 겸손은 예수님처럼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아지는 것이다. 즉 사람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 절대적 겸손이다. 능력 수준은 높이고 요구 수준은 낮추라. 고난의 때를 반추하며 요구 수준을 낮추면 불평할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배낭만 메고 6.25때 남쪽으로 내려와 자수성가해서 잘 살게 되었다. 그는 옛날을 생각하면서 그 배낭을 거실에 걸어두었다. 가끔 아이들이 사치스러운 요구를 하고 불평하면 배낭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는 저 배낭을 메고 3.8선 넘어올 때를 생각하면서 과소비와 불평의 절제를 수시로 다짐한단다.”
예수님은 영광스런 자리를 버리고 낮아지시면서 “나를 배우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자신의 대속적인 가난을 통해 성도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물질적인 부요는 없어도 섬기는 마음은 부요하라.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거나 노예화하지 말고 섬기는 종의 멍에를 즐겁게 메라.
겸손하면 은혜와 축복이 넘친다. 사람은 권위를 지배에서 찾지만 예수님은 섬김에서 찾으셨다. 사람은 가문을 따지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가문을 따지지 않고 목수 아들로 오셨다. 사람은 물질이 많으면 부요를 자랑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 말씀은 찢어지게 가난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겸손하게 사셨다는 말씀이다.
이사야서 53장을 보면 메시야는 풍채도 없고 모양도 없었다. 예수님이 자라난 나사렛은 시골이었다. 그처럼 낮아지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남을 차별하고 소속이 다르다고 미워하면 안 된다. 스님만 보면 무조건 보기 싫다는 것도 문제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라. 예수님은 늘 자신을 낮은 자로 지칭하셨다. 예수님도 낮아졌는데 내가 무엇이 있다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우월감을 가지면 안 된다.
사람 및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나를 낮추는 절대적 겸손을 갖추라. 그때 은혜도 넘치게 된다. 겸손이 없으면 언젠가 삶에 IMF가 찾아온다. 직장에서 승진하지 못할 사람은 금방 파악된다. 겸손하지 못하면 승진확률이 늘 후순위다. 조금 안다고 상사에게 거슬리는 말만 하면 승진할 수 없다. 겸손한 사람이 세상에서도 축복받는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겸손해지면 영광스런 부활의 역사를 맛본다.<2019.5.20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