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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 거하라 (창세기 11장 26-32절)
작성자 요삼일육선교회 등록일 2019-07-08
창세기 11장 26-32절
26.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27.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하나님 안에 거하라 (창세기 11장 26-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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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안의 비전을 고수하라 >
   
  본문 27절부터는 아브라함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으로서 그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을 낳았고 그 외에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26절). 언뜻 보면 아브람이 데라의 장자 같다. 그러나 나홀이 하란의 딸인 밀가와 결혼했다는 29절 말씀을 볼 때 실제 장자는 하란으로 추정되지만 아브람이 장자권을 얻어 가장 먼저 언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란은 롯을 낳았다(27절). 결국 아브람과 롯은 삼촌과 조카 관계다.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고향인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다(28절). 하란의 죽음은 성경에서 아버지보다 자식이 먼저 죽은 최초의 기록이다. 아브람은 이복동생인 사래와 결혼했다(29절). 나중에 아브람은 애굽 왕 바로 앞과(창 12장)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창 20장) 사래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는데 그 말이 100% 거짓말은 아니었다. 사래는 이복누이였기 때문이다(창 20:12). 나홀은 하란의 딸인 조카 밀가와 결혼했다. 결국 아브람과 나홀 형제 모두 근친결혼을 한 셈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데라 집안은 콩가루 집안 같다. 더 나아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까지 어떻게 그렇게 비윤리적인 결혼을 했느냐고 하겠지만 초기 인류가 적었을 때는 근친결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사람이 많아지면서 근친결혼은 가정의 정결성과 윤리성을 지키려고 모세 율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레 18:6-18).
   
  처음에 사래는 임신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30절). 그때 아브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받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낙심과 절망과 열등감 가운데 살았을 것이다. 당시에 자식이 없어서 인간적으로 저주받은 사람처럼 여겨졌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반전의 역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데라의 아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를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의 비전을 가지고 과감히 우르를 떠났고 더 나아가 하란도 떠나면서 그 비전을 끝까지 고수했기 때문이다.
   
  < 잘못된 장소를 떠나라 >
   
  잘못된 곳이라고 생각되면 가나안의 비전을 가지고 과감히 떠나라. 마음이 아프지만 복된 출발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물론 자기감정이나 자기 뜻대로 무조건 떠나면 안 된다. 미운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도 안 된다. 잘못된 것이 분명한데 그 잘못이 바뀌지 않고 공동체를 최대한 바르게 만들고 지혜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선한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과감하게 현재의 자리를 떠날 필요도 있다.
   
  성도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당신 사명받았어.”라는 말이다. 그 말은 이단이 영혼을 자기 공동체로 꾀거나 자기 사역자를 만들려고 가장 애용해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말만 듣고 쉽게 가정과 직장과 일터를 버리거나 기존 교회를 떠나거나 혹은 신학교에 간다고 하지 말라. 성도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존재다. 자기를 띄우는 말에 감격해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오해하면 인생길을 잃기 쉽다.
   
  성도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말이다. 물론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로 살아야 하지만 그 말도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잘못 받아들여서 세상과 공동체를 내 마음과 생각과 취향대로 바꾸겠다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면 안 된다. 성도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말은 말씀에 순종해서 먼저 나를 바꾼 후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말이다.
   
  말씀 안에서 혹은 공동체의 리더십 안에서 나를 바꿀 줄 모르면서 세상을 바꾸고 공동체를 바꾸고 이웃을 바꾸겠다고 하면 상처받고 실망할 일이 많아지면서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안 변해?”라는 불평과 함께 더 힘들어진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꼭 먼저 훈련해서 갖춰야 할 자질은 나부터 변화시키려는 순종의 자질이다. 순종을 아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해야 진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난다.
   
  순종의 자질을 갖추었는데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잘못된 곳이란 확신이 들면 과감히 그곳을 떠나라. 역사상 수많은 인물들이 아브라함처럼 과감히 잘못된 곳을 떠났기에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좋은 곳은 끝까지 붙잡고 나쁜 곳은 과감히 떠나라. 나쁜 곳을 떠나고 나쁜 태도를 버리고 과감히 새롭게 출발해야 참된 복이 주어진다. 끊고 맺는 것을 잘하라. 나쁜 것을 끊기만 잘하면 안 되고 좋은 것에 매이는 것도 잘하라. 좋은 것에 매이지 않고 끊기만 잘하면 행복할 수 없다. 좋은 것에 매이려고 나쁜 것을 끊어야 한다.
   
  < 맺고 끊기를 잘하라 >
   
  가끔 <월새기(월간새벽기도)>로 은혜받은 사람이 저희 사무실로 전화해서 계좌번호를 묻는다. 그 이유를 물을 때 그가 “선교헌금을 하고 싶은데 어디로 하면 되나요?”라고 하면 계좌번호를 가르쳐준다. 반면에 그가 “은혜를 많이 받아서 십일조를 내려고 해요.”라고 하면 본부장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십일조는 본 교회에 드리세요.”라고 하면서 계좌번호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재정이 많아서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내 교회에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교회가 늘 싸우거나 십일조를 잘못 쓰는 것 같으면 드리고 싶지 않다. 그래도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는 내 교회에 드려야 한다. 내 교회가 싸움과 갈등이 심해서 지옥처럼 느껴지거나 교회의 방향과 스타일이 내 생각과 맞지 않아서 도저히 기쁘게 순종하지 못할 것 같으면 신중히 기도한 후 차라리 빨리 교회를 옮기는 것이 낫지 몸은 매이고 마음은 끊긴 상태에서 십일조를 안 드릴 수 없어 다른 곳에 내는 모습은 복된 모습이 아니다.
   
  잘못된 곳이라 생각되고 도저히 교회 방향에 순종할 수 없다면 소중한 내 인생을 위해 끊는 결단을 잘해야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내가 떠난 교회도 진짜 잘못된 곳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그렇게 떠난 후 새로운 교회에서는 절대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 왜 그런 결단이 필요한가? 어느 리더든지 신실한 순종이 없는 사람을 중요한 일을 맡기는 데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리더가 팔로워를 이용하다가 커진 후 버릴 생각을 가지고서 비전이 다르고 순종하지 않아도 물질과 재능이 있는 팔로워를 전략적으로 한동안 품을 수는 있다. 그런 리더 밑에 있으면 열심히 헌금하고 봉사해도 나중에는 버려진다. 그런 모습은 정치에서 숱하게 벌어지고 있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왕조에서도 숱하게 벌어졌다. 수많은 개국공신이 나중에 말로가 비참해지는 이유는 왕이 힘을 기른 후에 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남의 힘과 인맥을 이용해 돈과 권력을 얻으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정과 교회에서는 인간적인 유익을 위해 영혼을 찾거나 버리지 말고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려는 한 가족의 마음만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신중하게 몸과 마음을 온전히 겸손하게 바치고 섬길 교회를 선택한 후 거기서 천국 평화와 교제를 누리며 찬란한 내일을 꿈꿔야 한다. 그처럼 천국 공동체의 중심에 있다가 때가 되면 한 분야의 영적인 기업을 맡을 정도로 신뢰받는 인간상을 갖추라.
   
  어디서든지 들러리 인생이 아닌 중심 인생으로 살라. 교회의 비전과 철학과 성향이 너무 맞지 않아서 자기를 바쳐 중심 인생으로 살지 못할 것 같으면 과감히 자기를 온전히 바칠 곳으로 떠나라. 그렇게 떠나지 않으려면 나의 불순종 성향을 과감히 떠나보내라. 그래야 공동체에서 중심에 설 수 있고 천국 보상도 커진다. 내 소중한 인생이 천국 보상을 잘 예비하는 인생이 되도록 어디서든지 눈물 어린 섬김을 보여주라.
   
  어느 공동체든지 바른 리더는 준비된 사람에게 거룩한 기업을 맡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공적인 공동체도 한 세대도 그 영향력을 지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한 영향력이 백년, 천년까지 지속되게 하려면 신실한 후사에게 기업을 맡기라. 자기 친 자녀라도 진실한 믿음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기업을 맡기지 말라. 이삭이 없거나 이삭이 준비되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의 기업은 엘리에셀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이제 조만간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영어> 사역이 시작될 것이다. 필자는 그 사역을 섬길 사람을 선택하는 문제로 오래 기도해왔다. 미국의 동료 목사 자녀들 중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잘하는 자녀들이 꽤 많다. 가족과 친척 중에도 영어가 탁월한 자녀들이 있다. 어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월새기 영어> 사역을 위해 선택받았으면 하고 원한다. 그래도 인격과 순종의 자질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선택할 수 없다.
   
  리더가 공동체의 영적인 기업을 맡길 때는 대개 비전과 철학이 맞고 순종할 줄도 알고 충성심과 신실함이 보증된 비전 동지를 선택한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할 때 평범한 교인으로 머물지 말고 비전 동지까지 되는 꿈을 가지라. 그런 꿈을 가진 사람이 모이면 소수를 통해서도 큰일을 이룰 수 있다. 요새 싸우는 대형교회 얘기를 종종 듣는다. 싸우는 다수는 큰 영향력이 없다. 목회자의 몸과 마음도 축나고 성도에게도 고통이다. 반면에 마음이 잘 맞으면 소수라도 즐겁게 큰일을 할 수 있다.
   
  < 하나님 안에 거하라 >
   
  잘못된 곳을 과감히 떠나면 아브라함처럼 되지만 잘못 떠나면 아브라함은커녕 버려진 외톨이처럼 될 수 있다. 그래서 떠남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떠난다’는 말에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잘못된 것(곳)에서 떠난다’는 개념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떠난다’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소명감을 가지라. 성도에게 가장 복되고 성공적인 삶은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3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주인과 종 관계’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인과 종 관계였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만들어주셨다. 셋째는 ‘신랑과 신부 관계’다. 그 관계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관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인과 종 관계를 초월하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넘어서고 신랑과 신부 관계까지 되게 하라. 성도의 신앙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중 에서는 멋지고 능숙한 사냥꾼이어서 인간적으로는 매력적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매력적이 아니었다. 에서형 교인이 되지 말라. 사냥을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해도 하나님은 성공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에서와 유사한 인물로서 ‘용감한 사냥꾼’으로 불리며 고대에 대제국을 이룬 니므롯도 인간적으로는 성공했지만 하나님 앞에 교만해서 결국 버림받았다. 부와 성공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부와 성공으로 하나님을 잃고 겸손을 잃고 사명과 비전을 잃으면 나쁜 것이 된다.
   
  부와 성공이 있어도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라고 생각하고 늘 하나님 안에 있기를 힘쓰는 것이 복이다. 왜 하나님은 에서 대신 야곱을 선택했는가? 인간적인 매력은 적어도 하나님 안에 있기를 힘썼기 때문이다. 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려고 가나안의 비전을 가지고 우르와 하란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처럼 과감히 잘못된 곳을 떠나고 잘못된 태도를 버리며 늘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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