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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사는 축복 (누가복음 4장 31-37절)
작성자 요삼일육선교회 등록일 2019-12-23
누가복음 4장 31-37절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말씀대로 사는 축복 (누가복음 4장 31-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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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은 마음을 가지지 말라 >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와 안식일에 가르치셨다(31절). 가버나움은 나사렛 북동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갈릴리의 핵심 도시로서 예수님 초기 사역의 근거지였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과 관련된 말씀에서 ‘내려왔다’는 표현을 보면 깊은 감동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성도는 올라가는 삶의 전반전도 잘해야 하지만 올라간 후 내려오는 삶의 후반전도 잘해야 한다. 후반전까지 잘해서 승리한 것이 진짜 승리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낮은 영혼을 찾으셨기에 낮은 영혼을 외면하면 예수님을 만나기 힘들다. 늘 어두운 그늘을 살피고 하나님이 어느 때에 주신 감동을 따라 누군가를 도우라. 그런 손길들의 연대를 통해 세상은 점차 밝아진다. 물론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스스로 참여하되 남에게 참여하라고 강요하지는 말라.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이 중요하다. 내가 가진 것을 힘없는 의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놓을 때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임해주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깅림하신다는 표현은 하늘도 중요하지만 땅도 중요하다는 암시다. 성경은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하지만 위엣 것만 바라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래도 살피라. 대기권에서는 위와 아래가 있지만 대기권보다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면 거기에서는 사실상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다. 인간적인 위계질서에서 위와 아래를 너무 구분하는 것은 아직도 영적인 수준이 낮은 증거다.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차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다 품어야 할 존재로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이 생긴다.
 
   낮은 사람을 살피라는 말은 높은 사람을 무조건 욕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낮은 사람도 차별하지 말고 높은 사람도 차별하지 말라. 요즘 부자와 유명인이 잘못하면 언론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욕하면서 대중의 시선을 끌어 모아 독자 수를 늘리고 광고 수입을 늘린다. 그러나 부자 중에도 좋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어떤 부자는 자기 선행이 드러나면 남들이 냉소하거나 혹은 광고한다고 오해할까봐 은밀하게 선행을 한다. 보는 것만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라.
 
   사람은 삶의 이면에서 얼마나 나쁜 일 혹은 좋은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쁜 일은 10개의 언론이 10배로 기사를 쓰지만 좋은 일은 대개 한 언론이 한번만 쓰고 끝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대한 나쁜 소문도 잘 걸러서 들으라. 남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내 모습을 보지 못하는 불의를 사람은 심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은밀히 좋은 일을 많이 하라. 사람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알아주신다. 그것이면 족하다.
 
   낮은 사람도 차별하지 말고 높은 사람도 차별하지 말라. 부자나 유명인은 무조건 깎아내려도 좋다고 여기지 말라. 유명함이 짐이 될 때도 많다. 유명하면 보는 눈이 많아 아무래도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진다. 갑질 한 번 하면 무서운 여론재판을 받으니까 더 조심할 수밖에 없다. 나의 잘못보다 유명인의 잘못은 더 나쁜 것이란 생각도 바른 생각은 아니다. 비판 대상에도 차별을 두지 말라.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는 것도 차별이다. 그런 차별적인 높은 마음을 버리고 낮은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이 그 마음에 찾아오신다.
 
  < 말씀의 권세를 앞세우라 >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려면 말씀 친화적인 마음도 준비하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그 말씀이 권위가 있어서 놀랐다(31-32절). 그때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렀다(33절).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에 의해 몸과 정신이 지배된 사람이다. 귀신이 죽은 사람의 영혼처럼 행세하는 것은 귀신의 속임수다.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으로 변해 산 사람 속에 임한다는 귀신론도 비성경적이다.
 
   어떤 것에 중독된 상태를 무조건 귀신 들린 상태로 여기지도 말라. 자기 의지가 있어서 중독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며 사투하는 것은 귀신 들린 것이 아니다. 중독된 것도 무조건 귀신 들린 것으로 여기고 “도박 귀신아! 술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라는 식으로 하는 것은 이단 교주가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자신을 의존시키면서 돈과 영혼을 빼앗으려는 광고와 선전 술책이다.
 
   때로는 귀신 들린 상태가 병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흔하지는 않기에 병든 사람에게 무조건 “병마야! 물러가라.”라고 이단 교주의 습관적인 언어를 따라 하는 것도 잘못이다. 귀신 들리지 않았는데 무조건 귀신 들린 것처럼 여기면 귀신도 좋아하지만 이단 교주의 종교 영업이 쉬워진다. 그래서 이단 교주는 거의 예외 없이 귀신 얘기, 종말 얘기, 전쟁 얘기 등을 수시로 해서 영혼을 약화시킨 후 사로잡는다.
 
   귀신 들린 상태가 미치거나 병으로 나타나는 것 외에 때로는 주술적인 신들린 상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본문의 귀신 들린 사람은 주술적인 형태로 귀신 들린 사람이었다. 그가 소리 질렀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34절).” 언뜻 보면 귀신 들린 자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 장면은 귀신도 예수님을 높이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귀신은 영혼을 사로잡으려고 전략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거나 높이기도 한다.
 
   그때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의 칭송하는 말을 기뻐하지 않고 바로 귀신을 꾸짖으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곧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는데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35절). 이 장면을 통해 이단 교주를 비교적 쉽게 분별해낼 수 있다. 이단 교주는 ‘위대한 종, 능력의 종’이라고 하면 아주 좋아한다. 반면에 참된 리더는 그런 말이 들리면 오히려 잠잠하게 하고 자신을 감춘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면서 때리거나 흔들거나 주문을 외우는 등의 무속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즉시 귀신이 그에게서 나왔다. 그처럼 예수님이 말씀으로 간단히 귀신을 쫓아내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36절).” 그러면서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37절).
 
   왜 사람들이 그토록 놀랐는가? 당시에 축귀자들은 대부분 주문을 외우거나 신비하게 보이는 주술적 행위로 악령 추방 의식을 행했는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간단히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최대 권위와 능력의 바탕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개정도 안 되는 기독교 헌법이다. 성경 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성령님이 계시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마음에 찾아오신다.
 
  < 말씀대로 사는 축복 >
 
   발터 벤야민이란 유대계 독일학자는 나치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국경수비대가 접근하자 숨죽인 채 지니고 있던 괴테 시집을 꺼내 읽었다. 그에게는 괴테의 시가 내적인 평안의 원천이었다. 다급한 문제를 만나면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으라. 그러면 어떤 위대한 시집보다 더 마음에 평안이 생긴다. 예전에 프랑스 군인들은 전쟁터에 갈 때 배낭에 파스칼의 <팡세>를 넣고 갔었다. 그만큼 마음에 평안을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의 많은 군인들의 배낭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가 있으면 한다.
 
   <월새기> 사역이 5년 반이 되었다. 지난 6년간 종이 값도 조금씩 올랐고 이번에 활자를 키우면서 지면도 216페이지로 늘어났다. 그래도 후원금 한 권에 1,000원을 받는 것은 여전하다. 앞으로도 제가 천국 갈 때까지 후원금 1,000원만 받고도 계속 이 사역이 유지되게 해달라고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을 아뢰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많은 사람에게 평안의 원천으로 보이고 들려지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이다.
 
   군대와 교정기관에 <월새기>를 매월 무상으로 보내는 <사랑나눔> 기증이 이번 달부터 드디어 10,075권으로 만 권이 넘게 되었다. 가난한 심령으로 지내는 군인들과 교정기관 수용자들이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영혼이 변화되고 새로운 비전을 품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기쁘다. 사람은 심은 대로 열매를 거두고 들은 대로 사랑을 받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지켜주고 도와주신다.
 
   한 교단에서 신학대학원을 설립했다. 임시 신대원장으로 A 목사가 선임되었다. 그 후 신대원 체제 정비 과정에서 이사 및 강사 목사들마다 의견이 달랐고 그로 인해 신대원장이 많이 힘들어했다. 나중에 신대원이 커지면 신대원장이 총장이 될 가능성이 많았기에 그 자리를 은근히 원하는 이사와 교수들이 여러 의견으로 신대원장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잘 얘기해도 정치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어느 날 무수한 말 펀치로 마음고생이 심하던 신대원장에게 총회장이 말했다. “목사님! 지금은 정치가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듣는 길을 택하세요. 앞으로 그들의 강의에 신대원장으로서 강의 파악을 한다는 명목으로 수업에 다 참석해서 힘써 들으면 그들의 마음이 호의적으로 변할 겁니다.” 그 말대로 신대원장이 강사 목사들의 모든 수업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러자 점차 강사 목사들이 신대원장의 리더십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것은 그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길이다. 듣고 순종까지 하면 더욱 최고지만 그 전에 잘 듣는 것만으로도 큰 신임을 얻는다. 물론 아무 말이나 다 들을 수 없다. 이단 교주의 말을 들으면 죽음의 직통로가 열린다. 좋은 멘토를 잘 택하라. 그리고 택했으면 죽도록 잘 들으라. 그런 캐릭터를 체질화시키면 성공의 직통로가 열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힘써 순종까지 하면 축복의 직통로가 열린다.
 
   기도 능력은 기도 소리가 크고 신비하고 멋지게 들리는 것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능력 있는 기도란 결국 응답 받는 기도다.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언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가? 기도하면서 기도 제목을 잘 아뢸 때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때다. 입보다 귀가 발달된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다. 소원도 말하면서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더 얻는다. 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예수님이 찾아오실 마음을 준비해서 더욱 큰 은혜를 얻어 누리는 복된 심령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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