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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나는 길 (누가복음 15장 17-20절)
작성자 요삼일육선교회 등록일 2020-07-13
누가복음 15장 17-20절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하나님을 만나는 길 (누가복음 15장 17-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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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낮아짐을 감사하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11절).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에서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했다. 히브리 사회에서 부친이 죽으면 두 아들 중 장자는 유산의 3분의 2를 받고 차자는 3분의 1을 받았다(신 21:17). 그러나 부친이 죽기도 전에 아들이 먼저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였다. 그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날릴 줄 알았지만 그냥 나눠줬다(12절).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아버지가 자기 몫을 주자 둘째 아들은 며칠 안 되어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탕진했다(13절). 그리고 남의 종이 되어 들에서 돼지를 치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14-15절). 그러나 돼지 치는 환경보다 아버지가 없는 사실이 더 비참한 것이다. 사람은 나쁜 환경보다 존재 의미의 상실이나 추락으로 더 절망한다. 축복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진짜 축복이 된다. 하나님을 떠나면 잘 살아도 불행한 인생이 되고 돈을 벌어도 낭비한 인생이 된다. 천국 통장에는 쌓아놓은 돈이 아닌 좋은 일에 쓴 돈만 저축되기 때문이다.
 
   결국 둘째 아들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16절). 쥐엄 열매는 쥐엄나무에 달린 약 10-20센티미터의 콩처럼 생긴 꼬투리 안에 10개 내외가 있는 열매인데 초대 교회 때는 ‘세례 요한의 떡’으로 불렸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먹었던 메뚜기는 곤충 메뚜기(하가브)가 아닌 쥐엄열매(하루브)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쥐엄 열매는 주로 가축 사료로 사용되지만 기근 때는 가난한 사람의 식량으로도 사용된다.
 
   둘째 아들에게 쥐엄 열매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존재 자체가 따돌려지고 소외되어 배고픔의 고통보다 외로움의 고통이 더 심했다는 암시다. 사람은 돈이 있으면 친구가 되자고 몰려오지만 돈이 떨어지면 외면한다. 그처럼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면 비참하게 낮아진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낮아짐은 오히려 축복이었다. 그때 아버지를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낮아지는 상황에 감사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새로운 은혜의 길이 열린다.
 
  2. 스스로 돌이키라
 
   어떻게 둘째 아들이 다시 행복을 찾았는가? 먼저 그는 스스로 돌이켰다(17절). 이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회심이란 하나님의 풍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떠난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녀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지만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회심했는가가 중요하다. 회심이 없다면 삶이 달라질 수 없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는 나의 부족함과 비참함을 자각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용기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간에는 큰 차이가 없다. 사람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출발점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살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나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자리는 대개 문제와 실패가 있는 자리다.
 
   지금 어떤 문제로 답답하다면 지금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기회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는 죽고 싶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힘든 현실은 우연이 아니고 그 현실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돌아서면 그 어려운 자리는 불행이 죽고 행복이 탄생하는 자리가 되고 그때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서 잿빛 현실 세계는 점차 찬란한 빛의 세계로 변할 것이다.
 
  3. 자신을 낮추라
 
   둘째 아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을 극도로 낮췄다(18절). 사람은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을 더욱 생생하게 만난다. 그래서 환경적으로 낮아지는 상황도 필요하지만 의지적으로 나를 낮추는 상황은 더욱 필요하다. 나를 낮추면서 남의 입장에 서려고 할 때 은혜와 진리와 사랑을 더욱 생생하게 깨닫고 체험할 수 있다.
   
   어느 날 한 50대 여인이 아파트 길에서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아는 목사가 지나가다가 왜 그렇게 서 있느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까 학원에 간 딸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아서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었다. 목사가 왜 밖에 서서 기다리느냐고 묻자 옛날의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옛날에 자신이 늦게 돌아오면 어머니가 늘 문밖에 서서 초조히 기다리다가 자신이 돌아오면 자기 손을 잡고 좋아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난 것이다. 사람이 철들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부모가 되어보아야 비로소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다.
 
   둘째 아들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가서 이렇게 고백하자고 결심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절).” 그는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여겨져도 좋다고 자신을 낮추었다. ‘낮아짐’과 ‘낮춤’은 다르다. 낮아진 환경에서도 자신을 낮추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문제는 계속된다. 그러나 낮아진 환경에서 스스로 낮추어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용기 있게 선언하면 그때부터 부족한 허물이 감춰지고 어디서든지 사랑 받고 쓰임 받는다.
 
   복을 원하면 “나를 축복하소서.”라는 권리주장의 선언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권리포기의 선언을 앞세우라. 믿음과 사랑으로 정당한 권리까지 포기화면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 시스템이 신속히 가동된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은 손에서 능력의 장풍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세요.”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교회에서 크게 은혜 받는 비결도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세요.”라고 하는 고백에 있다. 그런 고백으로 살면 감사도 넘치고 은혜와 축복도 넘치게 된다.
 
  4. 하나님께 돌아가라
 
   둘째 아들이 자기를 낮출 결심을 한 후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갔다(20절). 그는 생각으로만 회심하지 않고 행동으로 회개했다. ‘돌이킴’의 결심(決心)은 ‘돌아감’의 결단(決斷)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참된 회개는 눈물 흘리고 감정풀이만 하고 끝나거나 생각과 말로만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회심한 후 새롭게 출발하는 발걸음도 있어야 진짜 회개한 것이다. 천사처럼 생각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좋지만 결심만 있고 결단이 없으면 안 된다. 좋은 결단이 없으면 결딴난다. 행동하는 믿음이 있어야 믿음의 축복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사람이 돌아가야 할 원래 자리는 하나님의 품이다. 아름다움이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다. 제 자리를 떠나면 추해진다. 선인과 악인은 가장 큰 차이는 자리 차이다. 아우슈비츠의 독일군은 악마가 아니었다. 대개 평범한 군인이었지만 그들이 선 자리가 그들을 악마로 만들었다. 나를 실망시키는 사람은 대개 자리를 잘 찾지 못한 사람이다. 그를 무조건 탓하지 말고 제 자리를 잃었다고 여기고 제 자리를 찾도록 돕는 것이 사랑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품안에 있어야 가장 사람답게 된다. 아무리 빛이 안 나는 자리도 하나님이 있게 하셨다면 그 자리가 행복의 자리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기도원에 가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참된 진리는 가정을 작은 교회처럼 중시한다. 진리를 일상에서 소박하게 실천하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소박한 자리에서는 진리를 잘 찾지 못한다. 특히 삶이 편안하면 하나님을 애절하게 찾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가 사방의 길이 막히고 막다른 곳에 몰리면 비로소 울먹이며 하나님을 찾는다.
 
   어떤 사람은 인생길이 막힐 때 자기를 성찰하기보다 덜컥 질문부터 한다.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신다면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이 있어야 합니까?” 그러나 그 고통이 있는 것도 알고 보면 감사한 일이다. 때로는 고통 중에도 교만을 버리지 못하는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고통은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도구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다. 삶이 힘들 때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그 이후의 인생은 찬란한 인생이 될 것이다.
 
  <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
 
   마침내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가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들이 한 걸음 걸어오자 아버지가 열 걸음 달려가는 느낌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내가 ‘행위’로 달려가기 전에 하나님이 ‘은혜’로 달려오신다. 아버지에게 자녀의 허물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자녀가 아버지를 찾는 것 자체가 아버지에게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두 딸이 어렸을 때 새벽기도 끝나고 7시쯤 집에 들어가면 첫 딸이 7시 20분쯤에 눈을 비비며 내 방으로 왔다. 다시 5분쯤 후에 둘째 딸이 눈을 비비며 내 방으로 왔다. 그때 어떤 필요와 용건이 있어서 아빠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저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아빠를 찾은 것이었다. 그 모습이 큰 기쁨과 행복감을 주었다. 그때 아이들을 꼭 껴안으면서 결심도 하고 기도도 했다. “내가 아이들을 평생 힘써 지켜 주리라. 하나님! 아이들을 지켜주소서.”
 
   하나님도 똑같은 심정으로 우리를 대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문제가 있을 때만 찾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품이 좋기 때문에 찾으라. 하나님은 내가 부족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아도 늘 받아주시고 큰 죄와 허물이 있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더 기쁘게 맞아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이미 내게 넘쳐 있다. 고난조차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서 그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다. 중요한 것은 깨닫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구원받은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진노나 외면에도 사랑이 깃들어 있다. 그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기에 나는 아무렇게나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뜻과 사명대로 살아야 행복하다. 사랑은 사명으로 발전해야 진짜 사랑이다. 늘 하나님을 꼭 붙잡고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꿈을 향해 힘차게 전진해서 마침내 그 꿈을 이루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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