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5편 1-2절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하나님 의식을 가지라 (시편 145편 1-2절)
< 하나님 의식을 가지라 >
교인이 완벽해서 교회에 다니는가? 아니다. 오히려 부족해서 다니는 것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가장 큰 차이는 ‘거룩성과 도덕성과 윤리성과 참을성의 차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의 차이’에 있다. 성도도 죄를 짓지만 그 의식의 바탕에 하나님 의식이 있기에 죄로 인한 괴로움과 안타까움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있다. 신자와 불신자는 그런 의식의 유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 행동의 유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남편은 혼자 교회에 나가는 아내를 공격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당신 교회에 나가면서 왜 그래?” 그런 말은 부부간에 해서는 안 되는 비겁하고 치졸한 말이다. 잘못했으면 잘못한 행위를 지적하며 문제를 풀어 가야지 집안과 출신지를 따지고 학력과 종교를 따진다면 얼마나 비겁한 모습인가? 그나마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듣기에 이혼 도장 콱 찍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아내는 매번 그런 말투로 비꼬는 남편을 보고 참다못해서 교회 출석을 포기하고 교인 계급장을 떼버린 후 남편에게 달려든다. 아니면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혀 자신을 파괴하고 가정을 외면한다. 그런 극한 상황이 되어서야 아내의 교회 출석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깨닫고 그 출석을 은근히 막고 비꼬면서 진리와 평안을 찾아보려는 아내의 마음에 칼을 들이댄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서 제일 비겁하고 야비한 태도는 진리를 따라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비꼬면서 우습게 여기는 태도다.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조차 “교인이 왜 저래?”라는 말투를 자주 쓴다. 마치 자신은 완벽한 교인이라는 말투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교인이 왜 저래?”란 말을 잘하는 교인이 오히려 교회에 욕 먹이는 행동을 할 때가 더 많다. 성도의 그런 어투는 자기 얼굴에 침 뱉기와 같다.
< 은혜 가운데 살라 >
성도는 ‘행위가 바른 사람’이 아니라 ‘행위가 바르려고 의식하는 사람’이고 또한 ‘완성된 사람’이 아니고 여전히 은혜가 필요한 ‘부족한 사람’이다. 내가 이제까지 똑똑해서 잘 살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앞으로도 계속되어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생활의 은혜’도 주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고 날마다 영원히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고백했다(1-2절). 시련이 없어서 그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도 무수히 시련이 많았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로부터 무섭게 쫓겨 다녔고 왕이 된 후에도 자식들이 서로 죽이고 심지어는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역모까지 일으켰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찬송을 잃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때문이었다.
은혜가 없으면 행복의 조건이 많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지만 은혜가 넘치면 행복의 조건이 적어도 행복을 느낀다. 왜 불평하는가?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은혜가 있으면 불평은 사라지고 불행 중에도 행복을 보는 눈이 생긴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 이전에 은혜다.
필자가 미국 유학 중 가깝게 지냈던 한 맹인 전도사가 있었다. 그를 보면 힘든 유학 생활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그 친구는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중국 복음화의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살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시련도 이겨 내게 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결국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는 것이 행복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