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7편 10-11절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 (시편 107편 10-11절)
< 치유의 은혜를 입는 길 >
가끔 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이 있다. 그에게는 이런 부모의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얘야! 공부가 다가 아냐. 하나님 잘 믿고 네 장점을 살리면 얼마든지 성공한다. 너무 성적에 매이지 말고 네가 잘하는 분야를 찾아서 해봐라.” 성공과 행복은 성적순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좋은 믿음과 성품을 배양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 좋은 멘토와 연결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야 하기에 기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모의 기도를 배경으로 자란 자녀는 망하는 법이 없다. 눈물의 자녀는 눈물이 줄어들게 된다. 기도의 눈물은 아픔의 눈물을 막아준다. 살다 보면 수시로 고통을 당하지만 기도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최상의 길이 열린다.
사람에게는 크고 작은 여러 문제가 계속 닥친다. 건강문제도 중요한 문제다. 나이가 들면 몸의 부품이 고장 나면서 곳곳이 아파진다. 그처럼 인생은 죽을 때까지 기도제목이 계속된다. 어떤 교인들이 가끔 말한다. “목사님 가정에는 별로 걱정 근심이 없지요?” 큰 오해다. 걱정하지 않으려고 할뿐이지 걱정거리는 많다. 교회와 교인의 기도제목이 다 목회자의 기도제목이고 교인들이 기도하지 않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까지 기도해야 목회가 된다.
어떤 교인은 하루에 8시간 기도한다고 자랑한다. 영적인 자랑은 영적인 모습이 아니다. 기도를 위한 기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삶의 현장에서 예배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도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삶의 현장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도 ‘삶으로 드리는 기도’다. ‘8시간의 기도’는 자랑거리가 아니다.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몇 시간’이란 타이틀이 과시 외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는가?
<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 >
삶이란 끊임없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사람들 보기에 “저 사람은 아무런 근심과 염려가 없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알고 보면 그에게도 말 못할 고통과 염려가 있다. 사람에게는 모두 남모르는 자기만의 고통과 질병이 있다. 그런 고통과 질병에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해야 한다.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습관적으로 빠져드는 것을 멀리하라. 물론 세상 것을 다 끊고 완전히 거룩하게 살 수는 없다. 싫으나 좋으나 세상과 부딪쳐 살면서 세상 오락이나 세상적인 것을 대할 때도 많다. 그때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라. 오락 놀이도 할 수 있지만 예배 생활과 기도 생활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 오락 중에도 “기도할 시간이네, 금요기도회 가자.”고 일어설 수 있으면 재미로 오락을 할 수 있겠지만 오락에 빠질 것 같으면 그 오락을 금하라.
적절한 놀이 문화도 필요하다. 성직자가 아니라면 컴퓨터 게임도 심심풀이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해야 할 때는 금방 그칠 수 있어야 한다. 늦게 자도 새벽기도를 잘할 수 있으면 늦게 잘 수도 있지만 새벽기도에 지장이 되면 일찍 자는 것이 좋다. 세상의 즐거움을 완전히 단절하지는 못해도 즐거움의 포로가 되면 안 된다. 세상 것에 매이고 세상 즐거움에 포로가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매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라.
왜 사람이 고통과 질병의 사슬에 매이는가? 고통과 시련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다(11절). 자기 뜻을 앞세우거나 너무 서두르는 삶은 고통을 초래한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길이다. 말씀을 겸손하게 받고 말씀대로 살려는 태도는 고통과 질병을 치료해주는 최대 치료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