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23-25절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논리에 좌우되지 말라 (로마서 4장 23-25절)
< 구원의 믿음의 3대 요소 >
구원의 믿음에는 지적 요소, 정적 요소, 의지적 요소가 다 필요하다. 첫째, 지적 요소가 필요하다. 지적 요소란 ‘성경 말씀을 아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 이전에 ‘계시의 종교’다. 자기 뜻대로 믿지 말라. 자기 뜻이 하나님의 뜻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지옥과 천국만큼 큰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성경중심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둘째, 감정적 요소도 필요하다. 성경 말씀과 약속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감정적 요소가 없으면 믿음 생활이 냉랭해진다. 어떤 성도는 구원의 믿음에 대한 감사와 말씀에 대한 감격을 눈물로 표현하고 어떤 성도는 기뻐 뛰는 찬양으로 표현한다. 어떤 성도는 잔잔한 미소로 표현하고 어떤 성도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친절로 표현한다. 그처럼 다양한 감정적 표현을 통해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
셋째, 의지적 요소도 필요하다. 의지적인 요소가 있어야 ‘말만의 믿음’이 아닌 ‘행동하는 믿음’이 된다. 행함도 없이 말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엄마가 보채는 아이에게 “오늘 저녁에 자장면 사줄게.”라고 할 때 “야, 신난다!”라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엄마를 믿어요. 정말로 믿어요.”라고 하면 오히려 엄마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말만의 믿음’보다 ‘행동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한 할아버지가 가뭄에 비가 오게 해달라고 산에 기도하러 갈 때 손녀가 물었다. “어디 가세요?”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산에 간다.” 그러자 손녀가 또 물었다. “기도한 후 비가 올 텐데 우산은 안 가지고 가세요?” 유머지만 실제로 그 할아버지처럼 믿음도 없이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가 많다. 믿는다는 말보다 믿는 사람다운 행동이 중요하다.
< 논리에 좌우되지 말라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를 위한 예표였다(23-24절).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부활하셨다(25절).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구원의 믿음이 그만큼 중요하다. 구원의 믿음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근거를 둔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인간의 논리에 좌우되지 말라.
어떤 사람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해 믿음을 심으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만드셨는가? 사람은 몇 살로 부활하는가?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는가? 천국은 어디에 있고 어떤 모습인가?” 등등의 어려운 주제에 대해 그럴듯한 정교한 해답을 제시하며 전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정교한 논리가 참된 구원의 믿음을 주지는 않는다.
파스칼이 이런 논리를 폈다. “신이 존재함에 내기걸 때 그가 옳으면 구원을 얻지만 옳지 않으면 약간 손해를 본다.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음에 내기걸 때 그가 옳으면 손해는 없고 큰 유익도 없지만 그가 옳지 않으면 구원을 잃는다. 내기걸 때는 손익을 계산해야 한다. 결국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것이 이익이 많다. 그러므로 주저 없이 신이 존재함에 믿음의 승부를 걸라.” 그런 논리가 의도는 좋아도 참된 믿음은 주지 않는다.
파스칼의 논리를 예전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응용해 썼다. “시한부 종말론을 믿어서 옳으면 영생을 얻고 옳지 않으면 약간 손해를 본다. 그러나 시한부 종말론을 믿지 않아서 옳으면 손해는 없고 큰 이익도 없지만 옳지 않으면 영생을 놓친다. 그러므로 시한부 종말론을 믿어라.” 시한부 종말론을 믿어서 틀려도 손해가 없었는가? 아니다. 그런 헛된 믿음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것들을 이단 교주에게 빼앗겼다. 참된 구원의 믿음을 가지려면 논리에 너무 좌우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