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장 1-3절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영혼 구원에 힘쓰라 (로마서 9장 1-3절)
< 근심에 빠지지 말라 >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큰 근심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의 근심은 선한 근심으로서 필요한 근심이었다. 선한 근심은 필요하지만 나쁜 근심은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300번 이상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죄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염려로 키를 한 자도 자라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염려와 근심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다(고후 7:10). 근심은 삶을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남겨 두면 집안에 악취가 진동하고 건강이 나빠지듯이 마음속에 근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 그 정신적인 쓰레기로 인해 마음과 육체까지 병든다. 잠언 17장 2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실제로 질병의 70%이상이 근심과 불안과 공포로 생긴다고 한다.
나쁜 근심은 버려야 하지만 사도 바울이 가졌던 선한 근심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왜 근심했는가? 그가 고백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그는 동족을 사랑해서 그들에 대해 깊은 근심을 가지다가 그들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이 저주 받아도 좋다고 했다.
모세도 동족이 죄를 짓자 가슴아파하며 말했다. “하나님!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하셔도 좋습니다.” 예레미야도 동족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근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됩니다.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겠습니다(렘 9:1).”
< 영혼 구원에 힘쓰라 >
미국에 찰스 피니라는 유명한 전도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시카고의 거리에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거리에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같이 가던 사람이 물었다. “목사님, 왜 우셔요?” 피니가 대답했다. “저렇게 영생을 모르고 지옥으로 가는 무리를 보니까 너무 불쌍해서 그래요.”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특권이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방황하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런 예수님의 근심과 눈물을 가지고 내 주변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눈물로 씨를 뿌리라.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도다.”라고 하셨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성도다운 삶을 앞세워 눈물로 복음의 씨를 뿌릴 거룩한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
한 통계에 의하면 90%의 교인이 영혼을 한 사람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은 교인의 90% 이상이 일꾼이 아닌 구경꾼으로 지낸다는 말도 된다. 왜 성도가 전도를 안 하는가? 어떤 성도는 말한다. “저는 전도할 줄 몰라요. 전도는 제 은사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전도에는 방법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다.
한 영혼의 가치와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결코 잊지 말라. 성경은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성공했다고 하지만 진짜 성공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 준 사람이다. 세속적인 성공만 추구하지 말고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라. 내가 전도한 한 사람을 통해 엄청난 역사가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