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3장 30-33절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믿음이 없을 때 생기는 것 (민수기 13장 30-33절)
<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라 >
살다 보면 큰 장벽을 만날 때가 있지만 성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문제 앞에서 이길 수 없다고 하면 승리 가능성이 낮아지지만 이길 수 있다고 하면 승리 가능성이 높아진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최대한 삼가라. 부정적인 말은 문제를 얽히게 하지만 긍정적인 말은 문제를 풀리게 한다.
어떤 할머니는 늘 몸이 아팠는데 의사로부터 암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너무 아파서 결국 갔는데 진찰을 받을 때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진찰 후 의사가 말했다. “할머니, 별것 아니에요. 약 몇 번 드시면 나을 거예요.” 며칠 후 깨끗하게 나았다. 실제로 의사가 “별것 아녜요.”라고 말하면 웬만한 병은 다 낫는다고 한다.
어떤 말기 암 환자는 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고 말할 때마다 겸손하게 예쁜 말만 골라서 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병문안을 왔다가 오히려 그의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 얼마 후 그가 병원에서 사라졌다. 죽은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 병이 기적적으로 나아 퇴원한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과 말에는 놀라운 치유와 문제 해결 능력이 있다.
근심에 사로잡히지 말라. 사람의 근심 중 40%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근심, 30%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근심, 12%는 상상 속의 근심, 나머지 18%는 근심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한 근심이라고 한다. 근심은 거의 불필요한 것이란 뜻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긍정보다 부정을 좋아하지만 부정적이고 본능적인 다수보다 긍정적이고 의지적인 소수의 편에 서라. 부정보다 긍정이 낫고 비관보다 낙관이 낫다.
< 믿음이 없을 때 생기는 것 >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가나안으로 향할 때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상황을 탐지하려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다. 그들은 40일 동안 정탐했다. 그들은 똑같은 땅을 탐지하고 똑같은 사람을 보았는데 그중 10명은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절망적인 보고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희망적인 보고를 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현실에 하나님을 더해 생각했다. 그처럼 신자와 불신자의 태도는 크게 차이가 난다. 믿음이 없으면 무엇이 생기는가?
첫째, 환경에 대한 악평이다. 10명의 부정적인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악평했다. “그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다(32절).”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란 표현은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이라기보다는 비옥한 군사적인 요충지이기에 각 족속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워서 수많은 희생을 낳는 땅이란 표현에 가깝다. 왜 사람과 사회와 환경에 대해 악평하는가? 정말로 나쁘거나 악평하는 사람의 인성이 나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핵심 이유는 불신앙이다.
둘째, 문제에 대한 과장이다. 10명의 부정적인 정탐꾼은 말했다. “그 백성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다(32절).” 그처럼 많은 불신적인 사람들이 문제를 과장한다. “큰일 났어요.” 나중에 알고 보면 별로 큰 문제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과장하는가? 어떤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를 댈 때 가장 잘 쓰는 방법이 그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열등의식과 자학이다. 문제를 크게 과장하면 나중에는 정말 큰 문제라 여기고 자학에 빠진다.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는데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33절).” 지나친 자학과 열등감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자학적인 말은 삼가라. “저같이 못나고 못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음과 같은 자학적인 기도도 삼가라. “하나님! 벌레만도 못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무리 부족해도 나를 벌레만도 못하게 보지는 말라. 겸손도 너무 지나치면 다른 형태의 교만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