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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만 있으면 다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21절)
작성자 미션퍼블릭 등록일 2011-11-21
갈라디아서 2장 20-21절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은혜만 있으면 다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21절)
 (알림) 온새기 월요일말씀과 홈페이지 주일설교의 차이 
  • 매주 월요일은 전날의 주일설교를 일부 발췌해서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로 보내는 날입니다.
  • 오늘은 어제 주일설교의 약 60%를 발췌해서 보냅니다. 
  • 주일설교 100% 원문을 보기를 원하면  본 홈페이지 '주일설교' 란에서 보시면 됩니다

  < 행복을 노래하며 사십시오 >
 
   가끔 신실한 성도들에게 삶의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려고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보다 ‘은혜 받는 사람’을 통해 더욱 영광을 받으십니다.
 
   일도 은혜를 받고 해야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자기 힘으로 다 하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일꾼을 찾아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을 사람을 찾아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처럼 은혜를 많이 받고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하나님이 더욱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감사가 담기지 않은 일로는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순교도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할 때 행복을 노래하며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하나님! 이 원수를 갚아주소서!”라고 분노하며 죽으면 그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고난 중에도 범사에 감사하고 범사에 행복해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습니다.
 
   매년 입시철만 되면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판명 납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녀가 대학에 붙으면 붙은 대로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삽니다.
 
   어느 날 한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업이 망했어요. 이젠 인생 끝장났어요.” 그러나 사업이 끝장난 것은 사업이 끝장난 것이지 인생이 끝장난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최종목표는 ‘사업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사업하다 실패하면 그때도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그의 미래는 더욱 찬란할 것입니다. 사업이나 일보다 은혜가 중요합니다.
 
   옛날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 가끔 신학생들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에서 사역을 돕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학생들을 다 환영했지만 사역을 목적으로 온 학생들은 꾸준히 출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올 때는 좋았지만 갈 때는 부작용과 상처가 컸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중에는 신학생들이 사역을 돕겠다고 교회에 오겠다고 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교회에 오려면 사역을 위해 오지 말고 은혜 받으러 와!”
 
   일보다 은혜가 우선입니다. 교회는 일하러 오는 곳 이전에 은혜 받으러 오는 곳입니다. 일은 은혜 받은 후에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 일손이 부족해서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은혜보다 일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요새는 교회마다 돈 때문에 시험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교회출석의 목표가 되어도 안 되고 또한 교회에서는 돈 자랑을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돈 자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빌딩을 소유했다고 자랑하지만 사실 도봉산의 큰 바위덩어리 하나만도 못한 빌딩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특별히 3가지 자랑이 없어야 합니다. 첫째는 영성자랑이고, 둘째는 돈 자랑이고, 셋째는 봉사 자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통해 영광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노래하며 범사에 감사할 때 더욱 영광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 받을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십자가 안에서 사십시오
 
   본문 20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말은 십자가 안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죽어야 진짜 사는 길이 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야가 최종목적지가 아니기에 광야에서 자꾸만 애굽을 바라보지 말고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 속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광야 백성에게는 잠깐의 만족만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기뻐하다 슬퍼하다 40년을 보냈습니다. 왜 그렇게 변덕스럽게 살았습니까? 몸은 애굽을 떠났지만 수시로 애굽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가나안에 들어가야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그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가나안의 행복을 못 누리고 광야에서 배회합니까? 애굽의 고기 맛을 못 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여러분! 믿으면 부자 됩니다.” 물론 잘 믿으면 부자가 될 가능성은 커집니다. 그러나 부자 되는 것이 지상목표는 아닙니다. 그처럼 믿음을 내세워 애굽 것만 들춰내면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성도는 광야의 만나로 만족하지 말고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을 먹어야 합니다. 만나는 광야 백성이 먹는 것으로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그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일주일에 한 번 예배 때 만나를 배급받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나서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영적인 공복감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서십시오. 자꾸만 세상을 돌아보면 인생낭비가 심해집니다.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되었으면 옛사랑을 깨끗이 잊고 현재 배우자에게 몸과 마음을 확 주어야 합니다.
 
   어떤 여성은 결혼 전에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잡한 상황으로 결혼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결혼 전 사정을 잘 아는 친구가 물었습니다. “너 대단하다. 어떻게 과거의 상처를 잊고 그렇게 잘 사니?” 그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이미 베린 몸이잖아. 돌이킬 수 없으면 마음을 확 주고 살아야지. 그렇게 살아보니까 현재 남편도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처럼 예수님께 마음을 확 주십시오. 몸은 예수님께 왔어도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있으면 복된 역사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은혜생활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성이 풍부해서 말씀을 듣고 눈물도 잘 흘리지만 눈물이 그치면 금방 현실을 보고 탄식합니다. “하나님! 이제 어떻게 사나요?” 그렇게 기뻐하다 탄식하다 하면서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으면 축복도 받지 못합니다. 그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서야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감정적인 동정의 눈물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질 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는 승리와 평안의 원천이기에 동정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십자가의 고백을 가지고 살았기에 어떤 고난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십자가 안에서 행복을 노래하며 사십시오.
 
  2. 믿음 안에서 사십시오
 
   본문 20절 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길을 찾아 헤매는데 진정한 축복의 길은 결국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체질화시키는 삶에 있습니다.
 
   20년 전에 미국에서 귀국할 때 신학교 1년 선배가 귀국을 막으며 말했습니다. “이 전도사님! 한국에는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은데 왜 한국으로 가려고 합니까? 미국에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일전에 1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분은 그 전까지 한국에 왜 그렇게 초대형 교회가 많은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한국을 방문해서 8월 초 휴가철에 어디로 가는데 2시간 거리를 13시간 걸렸습니다. 너무 길이 막하니까 도로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 앞의 어떤 논두렁길로 한 자동차가 대담하게 들어서서 막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차들도 차머리를 들이밀고 그 길로 몰려서 얼마 후에는 그 길도 곧 막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비로소 대형교회의 생성원인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여러 방면에서 길이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길이 조금이라도 났다고 소문나면 사람들이 그리로 왕창 몰립니다. 교회도 작은 논두렁길이라도 열어주면 왕창 몰려서 대형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결국 세계 최대의 교회가 우리나라에 많다는 것이 자랑만은 아닙니다. 그 말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길이 막힌 사회라는 뜻도 됩니다.
 
   왜 그처럼 길이 막혔습니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불신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생각지 않은 곳에서 크게 길이 막힙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한건의 자동차 사고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부주의와 잘못으로 인한 차 사고가 수많은 사람들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그처럼 한 사람의 불신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길이 막힙니다. 게다가 서로 믿지 못하고 편법으로 남을 밟고 올라가려니까 더욱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왜 공무원들의 진급이 힘들었습니까? 밑에서 위로 차근차근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뜻에 따라 갑자기 위로 투하되는 낙하산 부대 때문입니다. 공무원들은 1급에서 9급까지 직급이 있어서 1급 자리가 하나 비면 이론적으로는 최대한 8명의 연쇄 승진 여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누가 낙하산 타고 내려와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8명의 승진 후보자의 승진 길이 막힙니다. 얼마나 기막힌 현실입니까?
 
   그런 낙하신 부대에 짓밟힌 한 공무원에게 어느 날 누군가 물었습니다. “요즘 잘 지내세요?” 그 질문에 그가 이렇게 역설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아직은 미치지 않았어요.” 참고 지내자니 너무 억울하고 사표를 내자니 처자식이 웁니다. 그래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 된 것입니다. 그처럼 불신과 편법은 수많은 사람들의 길을 막습니다.
 
   어느 날, 한 명문대출신 청년이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기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이상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속한 작은 부서에서도 직원들 사이에 험담과 권모술수가 판쳤습니다. 도대체 상식과 원칙이 없는 것을 보고 그가 금방 깨달았습니다. “이 사회는 정상적인 길은 없구나. 어떻게 살아남아 출세할 수 있을까? 손을 잘 비벼야 하나? 허리를 잘 굽혀야 하나? 뇌물을 들고 여기저기 뛰어야 하나?”
 
   그때부터 요령을 피우며 논두렁길로 질러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 엉켜버립니다. 신호등이 고장 난 곳에서 서로 먼저 가려다가 얽혀서 아무도 못 나가는 상황이 회사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일에 대한 무슨 보람과 소명이 생기겠습니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불신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길을 막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좁은 진리의 길로 가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은 좁은 길이지만 처음만 좁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좁은 길로 가면 점점 그 길이 넓어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길이 없어집니다. 사방이 다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단이 기뻐하는 길은 처음에는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찾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길이 좁아지다가 나중에는 꽉 막힌 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담을 곳을 선택할 때는 ‘작아질 큰 곳’을 선택하지 말고 ‘커질 작은 곳’을 선택하십시오.
 
   가끔 강남의 호텔에 가보면 늙은 일본 관광객과 젊은 한국 여자가 같이 다니는 모습을 봅니다. 20대 여성들이 부끄러움도 없이 태연하게 같이 다닙니다. 얼굴은 아름답고 몸에는 고가 사치품도 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걸친 고가의 사치품은 인격의 싼 티만 부각시킬 뿐입니다. 그래도 현재의 모습만 보면 꽤 화려합니다. 문제는 미래입니다.
 
   5년 후에 그 여성들은 어떻게 될까요? 삶의 반경이 상당히 좁아져 있을 것입니다. 10년 후에는 삶의 반경이 더욱 좁아져 있을 것이고, 15년 후에는 삶이 더욱 절망적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처럼 불신의 길은 시간이 갈수록 좁아지지만 믿음의 길은 시간이 갈수록 넓어집니다. 이제 예수님을 꼭 붙잡고 믿음 안에서 사십시오. 그러면 자신의 믿음은 결코 자신의 삶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은혜 안에서 사십시오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율법주의를 경고한 말씀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결국 율법주의는 하나님이 빠진 인본주의입니다.
 
   그런 인본적인 생각을 가지면 예수님을 믿어도 문제가 많습니다. 자기 의와 자랑 때문에 하나님의 진국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라는 의식이 강하면 진짜 은혜와 축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어도 “내가 잘해서! 내가 똑똑해서!”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철저히 버리십시오. 그래서 은밀한 헌신을 많이 훈련하고 체질화시켜야 합니다.
 
   습관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자기를 나타내려는 과거의 본능적인 습관이 모습을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느새 율법주의가 삶 속에 파고 들어와 참된 믿음을 방해합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 왜 영어를 못합니까? 밖에서는 열심히 영어를 써도 집에 돌아오면 편하게 다시 한국말을 쓰니까 영어가 습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니라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가 점점 자기를 내세우려는 본능이 작동하면 어느새 행위가 있어야 의롭게 된다고 착각합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목적은 현재를 토대로 세워도 방법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옛 것의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 우상 숭배하던 사람이 회개하면 그 우상숭배 하던 방법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기 전에 중요한 일만 있으면 점을 치러 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점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줄 알고 그것을 버렸지만 점점 옛날의 점치는 습관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흔히 ‘예수점’이라고 말하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또한 한때 무속인을 섬기던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을 환각적인 무아지경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처럼 사람은 본능적으로 과거로 복귀하려는 습관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은혜의 삶에서 이탈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외적인 행위와 현상에 마음을 잘 빼앗기는 율법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서 처음에는 은혜 가운데 지내다가 점점 행위와 현상을 따르는 본능으로 돌아가서 은혜를 헛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만은 결코 잊지 마십시오. 성도다운 행위와 기적적인 현상은 은혜 받은 자가 은혜를 앞세워서 살 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 은혜만 있으면 다 됩니다 >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추구하고 많이 받으십시오. 진짜 능력 있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됩니다. 베드로가 밤새 물고기를 못 잡고 지친 몸으로 빈 배를 끌고 오자 예수님은 그의 빈 배에 ‘고기’를 채워주시기 전에 ‘말씀’을 채워주셨습니다. ‘물질이 채워지는 것’보다 ‘은혜가 채워지는 것’이 먼저입니다.
 
   요한 3서 2절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에게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먼저 은혜가 있어야 범사가 잘 되고 건강도 찾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질은 많아도 은혜가 없는 사람보다 물질은 없어도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은 많은데 그 영혼은 얼마나 파리하고 창백합니까? 그처럼 세상 것이 아무리 넘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끔 멋지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집사님! 어떻게 그렇게 성공했어요?” 그러면 진짜 행복한 성공자들은 거의 유사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그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은 은혜 받을 자격이 없고 별로 한 일도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서 그런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은혜를 앞세우고 감사하는 사람이 진짜 성공자입니다.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지난 세월에 어떻게 수많은 목회의 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잘 지내왔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한 가지가 강력하게 떠올랐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몰라도 아마 신학교 때부터라고 생각되는데 그때부터 극심한 어려움을 만나면 저의 입에서는 자동반사적으로 이런 세 마디 말이 고백처럼 나왔습니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까 그 세 단어의 고백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수많은 삶의 위기를 잘 극복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 그렇게 해보십시오. 열심히 공들인 사업이 망해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죽을병에 걸렸어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엄청난 배신의 상처를 당해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지어는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응답이 180도 반대로 나타나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고백을 체질화시키십시오. 그 고백이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고 그 고백이 들려지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물꼬도 급속히 트일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를 가장 멋진 인생으로 이끌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교회 사무원에게 설교 제목을 알려주었습니다. 제목은 ‘은혜’였습니다. 그러자 사무원이 주보를 만들다가 확인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목이 정말 ‘은혜’ 딱 두 글자입니까?” 설교 제목이 너무 간단해서 혹시 전달과정에 실수가 없었는가 해서 물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은혜 딱 두 글자면 됩니다.” 그때 그 목사님의 말이 그녀의 마음에 꽂혔습니다. “맞아! 은혜만 있으면 다 되지.” 그 뒤로부터 그녀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은혜만 있으면 다 됩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많이 받으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받아도 부작용이 없는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삶이 풍성해지고 누구보다 멋진 성공자가 됩니다. 항상 은혜를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이미 십자가 안에서 큰 은혜를 받은 존재로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그처럼 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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