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1장 1-8절
(1절)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2절)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3절)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4절)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5절)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6절)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7절)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8절)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비방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사야 51장 1-8절)
< 소망을 굳건하게 만드는 길 >
본문에는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일의 굳건한 소망을 주기 위한 여러 가지 권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내일의 소망을 굳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1-2절). 그러면 미래에도 그런 은혜와 축복이 있을 것이 더욱 굳게 믿어집니다. 과거의 상처는 물에 새기고 과거의 은혜는 돌에 새기십시오. 과거의 은혜에 대한 탁월한 기억력은 내일의 축복에 대한 소망을 뚜렷하게 합니다.
둘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4절).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뚜렷한 목적지도 없으면서 남이 달리니까 자신도 무작정 달리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까? 군중 속에서 자신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소명을 알고 자신의 장점을 알고 자신의 길을 가십시오.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주의를 두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결국 내일의 주인공이 됩니다.
셋째,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5-6절). 어느 날, 전국 기독 대학생 회장으로 있던 한 청년에게 한 전도자가 물었습니다. “학생! 구원의 확신이 있어요?” 그 회장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자신이 전국 기독 대학생 회장으로 있기에 자신은 당연히 구원의 확신이 있을 줄 알고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떠난 뒤로 그 전도자의 질문이 맴돌면서 구원의 확신 문제로 왠지 불안했습니다. 그때부터 구원의 확신을 얻겠다고 책도 많이 읽고 여러 집회에 참석했지만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성경을 보다가 갑자기 한 성경 말씀이 가슴이 꽂히면서 구원의 확신이 생겼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때 구원의 확신을 얻고 마음속에 깊은 평안이 임했습니다. 그 평안을 무기로 어떤 고난과 시련도 넉넉하게 극복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승리하는 삶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안전판입니다.
< 비방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마지막으로 비방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7절). 요새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비방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교인들을 보면 이렇게 비방합니다. “믿는 사람이 왜 저래?” 그러나 기독교인은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왜소함과 연약함과 부족함과 못됨을 절감해서 하나님이 없이는 못살겠다고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잘못이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 전체를 비방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비방입니다. 믿는 사람만 그런 잘못을 합니까? 대개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이 그런 잘못을 더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교회를 보면 이렇게 비방합니다. “교회가 왜 저래?” 그러나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교회도 얼마든지 허물을 보일 수 있습니다. 교회만 그런 잘못을 저지르겠습니까? 대개 보면 일반 공동체는 그런 잘못을 더 많이 저지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떤 잘못으로 교회의 존재 자체를 깡그리 비방하는 것은 역시 정당하지 못한 비방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난이 있으면 이렇게 비방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재난이 있는 것’이 ‘하나님이 없는 증거’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재난이 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왜 선한 사람에게도 재난을 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난에 내포된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어떻게 사람이 정확하게 알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부당하고 야비하고 매몰찬 비방들을 접합니다. 그런 비방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비방을 통해서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반성하되 믿음이 흔들리거나 믿음을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정당하지 않게 비방하는 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8절). 그러므로 누가 비방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그들의 비참한 결말을 생각하며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정당한 비판과 부당한 비방을 잘 분별해서 비방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과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게 할 때 조만간 복된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