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의 ‘토라(Torah)’는 원래 사랑에 바탕을 둔 평등 율법으로서 그 핵심 내용은 3가지의 단어로 압축된다. 첫째, ‘미쉬팟(mishpat)’이다. 미쉬팟은 ‘최소한의 정의’를 뜻한다. 잘못하면 정당한 벌을 받고 손해를 입히면 정당한 보상을 하는 최소한의 정의가 무너지면 사회는 존속되기 힘들다. 미쉬팟은 특권 계층이나 소외 계층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으로 오늘날의 사법적인 정의를 뜻한다.
둘째, ‘체다카(tzedakah)’이다. 이것은 ‘분배적인 정의’를 뜻한다. 토라는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추수할 때 밭 한 모퉁이는 남겨 두고 희년에 빚을 탕감해 주라는 계명은 가난한 약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하는 계명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잠시 보낸 사람이 욕심에 젖어 남의 것을 빼앗으며 불행하게 살기보다 나눔을 통해 서로를 돌보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나눔은 선행이 아닌 정의다.
셋째, ‘헤세드(hesed)’이다. 이것은 ‘언약적인 은혜’를 뜻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시다가도 곧 언약을 따라 회개의 기회를 주신 후 회개하면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런 은혜의 흐름을 따라 사회적 약자를 은혜롭게 받아 주고 돌볼 때 복된 세상이 된다. 그런 자비의 사회화를 꿈꾸고 실천하라.
예수님이 꿈꾸신 세상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이 먼 것 같아도 낙심하지 말라. 갈 길을 찾았다면 낙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나누려는 마인드를 가지고 거룩한 길로 가는 사람과 늘 동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외모나 조건을 보지 말고 가난하고 의로운 약자를 힘써 도우면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산다면 누구나 능력 있고 감동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미국의 한 가난한 청년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꿈을 품었다. 그가 마침내 대학 입학 허가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대학 근처로 거처를 옮기고 학기 시작 전까지 근처 농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점심 시간에 남들은 다 도시락을 꺼내 먹는데 그는 도시락을 싸 올 형편이 못 되어 헛간 뒤로 가서 앉아 있었다. 남들이 왜 점심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속이 좋지 않다고 하며 수돗물만 실컷 마셨다.
며칠 후 인부 조장이 점심 식사 시간에 큰소리로 벌컥 화를 냈다. “이 놈의 마누라가 내가 돼진 줄 알아. 이렇게 많이 싸 주다니. 누구 내 도시락 좀 먹어 줄 사람 없어?” 청년은 귀가 솔깃해졌다. 부끄럽게 얻어먹는 것도 아니고 남는 것을 먹어 주는 것이기에 그는 당당하게 조장의 남은 음식을 먹어 주었다. 그 후 거의 매일 인부 조장이 비슷한 말로 소리쳐서 청년은 아무 부담 없이 조장의 남은 음식을 먹어 주었다.
한 달 후 학기가 시작될 무렵 그가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농장을 그만두면서 조장 내외에게 감사 표현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넓은 농장에서 조장을 찾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경리 직원에게 조장과 조장 부인에게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 달라고 하자 그 직원이 말했다. “조장님 부인이요? 그분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남을 도울 때는 가급적이면 도움 받는 대상의 자존심을 지켜 주면서 내가 가진 범위 내에서 힘써 도우라. 왜 주는 삶이 없이 인색하게 사는가? 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는 기쁨을 몰라서다. 없을 때의 나눔은 더 큰 감동이 되고 인생의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는다. 삶의 감동이 없는 것에 대해 핑계를 삼가라. 지금 형편에서도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살면 누구나 감동적으로 살 수 있다. 그런 감동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복된 미래를 예비하고 천국 생명책에 이름을 영원히 남기라. - <월간새벽기도> 21년 11월호 중에서 발췌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