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출애굽기 21장 1-6절을 보면 종이 주인을 위해 6년간 일한 후 7년째가 되면 자유를 얻는데 주인이 너무 좋다고 자유를 포기하는 종도 있었다. 그러면 주인은 재판장으로부터 공증 받은 후 그 종을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는다. 그러면 그날부터 그는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고 주인도 그를 예전의 종처럼 부리지 않고 자기 아들처럼 대한다. 이런 종을 자유종이라고 한다.
부부는 서로에게 일종의 자유종이다. 사랑하기에 서로를 섬긴다면 서로에게 주어진 멍에는 무겁지 않다. 그처럼 서로 종노릇하며 섬겨 주면 인간관계가 풍요롭게 된다.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 여기면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왜 인간관계가 파괴되는가?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어 서로 종노릇하기보다 서로 주인 노릇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15).” 서로 종노릇하지 않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지나치게 경쟁하면 다 망한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예수님은 친히 종이 되어 종이란 비천한 단어를 영광스러운 단어로 만드셨다. 그렇다면 성도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생을 평가할 때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했는가’가 중요하다.
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 및 다른 복음을 얘기하다가 사랑 얘기를 하는가? 율법주의자는 영성을 자랑하며 남을 비판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왜 인간 사회에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는가? 인간의 교만과 율법주의 때문이고 결국 사랑의 결핍 때문이다. 율법주의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있을 때 비판과 정죄가 사라지고 공동체에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이 꽃핀다.
믿음의 공동체는 시계를 닮아야 한다. 시계 안에는 세 사람이 산다. 성급한 사람, 차분한 사람, 느긋한 사람이다. 성급한 초침, 차분한 분침, 느긋한 시침이 함께하며 시계는 멋진 조화를 이루면서 제 몫을 다한다. 성급한 초침은 차분한 분침을 비판하지 않고 느긋한 시침은 성급한 초침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처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기에 시계는 자기의 맡은 임무를 훌륭히 해낸다.
시계 안의 사람처럼 남이 내 생각이나 스타일과 도저히 맞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를 감싸 줄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복된 공동체가 된다. 사람은 공존하는 존재 겸 동역하는 존재다. 같이 살아가는 공존과 같이 일하는 동역이 다 중요하다. 공존은 삶의 기초이고 동역은 삶의 기둥이다. 단순한 공존을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지만 고차원적인 동역을 위해서는 법 이상의 도덕과 양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 <월간새벽기도> 21년 12월호 중에서 발췌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