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1장 16-27절
'고린도후서' 46편 말씀 중에서 40번째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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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성도의 표식 (고린도후서 11장 16-27절)
< 영성을 자랑하지 말라 >
베드로전서 1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왜 시험 중에 크게 기뻐하는가? 영원한 천국 소망이 있고 고난을 통해 더 강건해지기 때문이다. 불이 금을 태워 없애지 못하듯이 고난의 불은 순금 같은 성도를 태우지 못하고 오직 불순물을 제거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성도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
본문 16절을 보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사도 바울은 자랑이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았지만 거짓 선생들의 영성 자랑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밝히려고 조금 자랑해도 자신을 어리석게 보지 말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의 자랑하는 말이 주님의 뜻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미리 언급하면서 잠시 어리석은 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기탄없이 늘어놓겠다고 했다(17절). 자랑은 주님의 뜻이 아닌 어리석은 것이기에 영성 자랑을 하는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암시다. 그렇게 미리 자랑의 허구성에 대한 이해를 구한 후 거짓 선생들이 어리석게도 육신적인 자랑을 해서 자신도 자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했다(18절).
본문 19-20절을 보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당시 고린도교회 일부 교인들은 지혜롭다고 하면서 자랑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용납했다. 그래서 당시 거짓 선생들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종으로 삼거나 괴롭히거나 노략질하거나 스스로 높였고 심지어 교인들의 뺨까지 때리면서 크게 모욕했지만 그냥 당하고 있었다.
예전에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거짓 부흥사들은 청중 중에서 누군가를 좌석에서 일으켜 세워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일을 번번이 벌였다. 그러면 사람들은 부흥사들의 비인격성을 지적하기보다 오히려 카리스마가 있다고 칭송했다. 그처럼 바울 당시 거짓 선생들도 영성을 자랑하며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맘대로 갖고 놀았지만 교인들은 어리석게도 그런 거짓 선생들을 숭배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바울은 무시했다. 그런 지적을 하면서 바울은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려고 본격적으로 자기 자랑을 시작했다.
본문 21절을 보라. “나는 우리가 약한 것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바울은 자신의 영성을 자랑하는 문제에서는 누구보다 약해서 자랑거리를 자신 있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약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것인데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약하게 여겼다. 그처럼 영성 자랑의 허구와 교만을 잘 파악해서 영성을 자랑하는 사람을 분별해 멀리하려는 판단력이 없었기에 많은 교인이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영성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 외에 수많은 자랑거리가 있어도 힘써 감추면서 오히려 자신을 약한 존재로 여겼다. 그런 약한 존재로서 자랑하면 욕되고 어리석은 모습이 되기에 자랑이 꺼려지지만 그래도 담대하게 잠시 자랑하겠다고 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과는 반대로 자랑을 부끄럽게 여겼다. 결국 거짓 선생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모습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영성 자랑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 고난을 자랑하는 바울 >
당시 거짓 선생들이 주로 무엇을 자랑했는가? 자신들이 정통 히브리인이고 정통 이스라엘인이고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했다.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은 유사한 말이지만 히브리인은 민족적인 개념을 강조한 명칭이고 이스라엘인은 종교적이고 국가적인 개념을 강조한 명칭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도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인이고 아브라함의 씨라고 했다(22절). 즉 자신은 개종한 유대인이 아니라 혈통적 유대인으로서 고등 교육을 받은 정통 히브리인임을 자랑했다.
본문 23절을 보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이 구절에서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란 말은 “내 말이 정신없는 사람의 말처럼 들리겠지만”이란 말이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란 말을 보면 바울은 옥에 여러 번 갇혔다. 그가 옥에 갇힌 기록은 <사도행전>에 한 번 나오지만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는 바울이 일곱 번 투옥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자랑했지만 입만 화려한 일꾼이었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죽도록 수고하고 무수한 고난을 받은 바울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었다. 그처럼 바울은 자신이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참된 사도임을 실제적인 삶으로 증명했다.
바울은 사도의 참된 표시는 승리가 아닌 고난임을 깨우쳐 주면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본문 24절을 보라.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신명기 25장 1-3절에 의하면 태형을 집행할 때 40대를 넘기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40대를 넘겨 때리는 실수가 없도록 40대에서 1대를 뺀 39대를 때렸다. 바울은 그런 매를 5번 맞았다.
계속해서 본문 25절을 보라.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태장은 로마 시민에게는 금지된 로마식 태형으로 채찍 끝에 납을 매달아 때리는 무서운 형벌로서 그로 인해 죽는 경우도 많았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태장을 받은 것은 선교 목적을 위해 로마 시민의 권리를 포기했거나 관리들이 바울의 신분을 먼저 물어보는 법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번 돌로 맞은 고난’은 사도행전 14장의 루스드라 전도 때 겪었는데 그때 심하게 맞아서 사람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버렸다. 또한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26-27절). 바울이 회심 후 당한 무수한 고난에 대한 자랑은 참된 성도의 표식이 고난임을 잘 말해 준다.
< 고난은 성도의 표식 >
고난에는 복된 보상이 있다. 하나님은 성도의 시련을 결코 잊지 않고 그의 눈물을 병에 담아 두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고난을 기쁘게 맞이하면 자연스럽게 내일의 영광이 따라온다. 고난은 주님의 버림받은 존재라는 표식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표식이다.
군인들 목에는 인식표 둘이 있다. 그 표에는 군번과 이름이 적혀 있는데 전투 중에 죽으면 인식표 하나는 입에 물려 놓고 하나는 가져간다. 나중에라도 시신을 잘 수습하기 위해서다. 결국 군인들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죽음의 표식을 목에 걸고 다니는 셈이다. 교인의 대표적인 인식표는 무엇인가? 교인의 상징으로 성경책, 교패, 식사기도, 차에 붙인 물고기 등이 있지만 역시 대표적인 표식은 십자가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표식을 귀신을 쫓아내는 최고 도구로 여긴다. 영화에서 종종 십자가를 내밀면 드라큘라는 꼼짝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가끔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추태를 보이는 교인도 있지만 그래도 십자가는 교인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바울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었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초대 교회 당시에 십자가는 수치의 상징이었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고 천국 길을 잃은 사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셨다. 그래서 폭력과 미움과 분쟁으로 얼룩진 세상을 십자가의 큰 사랑으로 품으셨다. 예수님은 아무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다만 영혼을 가엾게 여기시며 죽음을 극복하는 길을 보여 주셨다. 미움을 미움으로 맞서고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죽음의 길과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하는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를 강조만 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은 참된 자유를 주신다. 결국 십자가는 짐이 되기보다 힘이 되고 대 자유를 약속하는 표식이다. 바울은 그토록 오랫동안 추구했던 것들이 십자가 안에 다 약속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십자가에 정욕을 못 박고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게 없다고 하면서 결국 참된 길을 찾았다. 그처럼 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내일의 복을 예비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