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는 큰 허물이다 >
어느 날, 성직자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가 과속으로 붙잡혔다. 경찰이 성직자들인 것을 알고 말했다. “아니, 아실만한 분들이 왜 그러세요? 그렇게 달리다 사고 나면 어떻게 해요? 한번 봐 드릴 테니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그때 한 성직자가 말했다. “우리는 괜찮아요. 예수님이 같이 타고 계시니까요.” 그러자 경찰이 말했다. “예수님이 타셨다고요? 세 분이 타면 불법입니다.” 그러면서 딱지를 뗐다는 유머가 있다.
목회자들도 가끔 과속할 때가 있다. 상처와 스트레스를 속도감을 통해 푸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이해해줄 수 있어도 단속되었을 때 “내가 목산데...”라고 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으면 안 된다. 그때는 오히려 신분을 감추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인생과 목회에서 이렇게 과속하며 살지 말자!”고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능력과 축복과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남용하면 그것은 축복의 도구가 아닌 근심의 도구가 된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하나님은 더욱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신다.
요즘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며 자기 왕국을 쌓는 사람에게 자신의 소중한 영혼을 파는 것이다. 무지와 무분별은 큰 허물이다.
한국 사람은 아시아에서 제일 평균 키가 크다. 지난 몇십 년간 잘 먹은 결과다. 반면에 북한은 아시아에서도 평균 키가 제일 작다. 같은 민족인데 몇십 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다른 종족처럼 되었는가? 신격화된 김씨 일가가 초호화판으로 잘 먹고 잘 살면서 수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굶주리게 하고 공포에 젖게 만든 결과 지금과 같이 다른 종족처럼 된 것이다. 문제는 그런 현실도 모르고 아직도 그들을 신처럼 추앙하는 북한 주민들이 많다는 것이다. 외부인들이 보기에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가?
이단 신자들도 똑같다. 그들은 자기 교주가 최고인 줄 알고 신격화한다. 외부인들은 교주가 자신을 신격화하며 각종 사술과 언술로 수많은 영혼을 농락하는 것을 뻔히 보는데 그들 내부에서는 교주를 메시야처럼 여기고 자기들만이 구원받을 144,000명의 선택된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 단체에 속한 신도들이 모든 것을 바치고 고생할 때 그 사이에 이단교주와 그 가족들과 측근들만 뒤에서 호화판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 빨리 그들이 그 단체에서 나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초대교회 때 베드로도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거짓 선생의 미혹에 더 이상 빠지지 않도록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이 본문 말씀이다.
< 베드로의 4가지 소원 >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자기 소원을 담아 성도들에게 몇 가지를 간절히 생각나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언급했고 13절에서는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언급했고 본문 15절에서도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언급했다. 베드로는 성도에게 무엇이 있기를 간절히 원했는가?
1. 진리 안에 서 있는 것
당시 거짓 선생들은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로 영혼들을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시켰기에 베드로는 자신의 순교가 임박한 줄 알고 죽기 전에 복음의 진리 안에 굳게 선 성도들에게 한 번 더 복음의 진리를 생각나게 하길 간절히 원했다(12-15절). 진리 안에 선 삶이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과 자비를 품은 삶이 바로 진리 안에 있는 삶이다.
진리 안에 굳게 서려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서 끝없이 자기를 비워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비우는 삶은 자기상실이 아니라 자기초월이다. 시냇물은 강으로 흘러들면서 더 커지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면서 더 커진다. 그처럼 하나님 안으로 자기를 비우고 들어가면 초월적인 위대한 역사가 나타난다.
왜 세상이 점차 혼란해지는가? 자기포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커지고 자의식이 강해지면 세상의 혼란도 커지고 자신의 고민도 가중된다. 성도는 늘 자기를 잘 덜어낼 줄 알아야 한다. 자기를 잘 덜어내고 주님을 겸손히 붙잡고 남의 뜻을 존중해주려고 할 때 진리 안에서 평화와 평안을 맛보게 될 것이다.
2. 예수님의 재림을 아는 것
본문 16절에서 ‘강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루시안’은 예수님의 초림이 아닌 재림을 뜻하는 단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과 재림에 대해 알게 함으로 성도들이 재림소망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림 얘기가 교묘히 만든 얘기가 아님을 확신시키려고 자신이 예수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봤다고 증거하면서 변화산 체험을 언급하며 그때 예수님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고 했다(16-18절).
왜 그런 체험을 얘기했는가?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히 믿고 용기를 내어 살라는 뜻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의와 공평으로 모든 불의를 심판하시고 신실한 성도의 한과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귀한 상급도 내려주실 것이다. 재림소망은 당시 핍박과 고난 중에 있던 성도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최대 원천이었기에 베드로는 당시 성도들이 재림에 대한 소망을 뚜렷하게 가지기를 원했다.
뚜렷한 재림소망을 가지라. 주님은 도적같이 예고 없이 오신다(벧후 3:10; 살전 5:2). 매일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자기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라. 또한 성도들끼리 가족처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야 한다. 가족이라고 해서 뭘 얻기를 바라면 안 된다. 얻을 생각은 하지 말고 줄 생각만 해야 진짜 가족이다. 그렇게 줄 생각을 하면서 살면 오히려 보람과 보상이 넘치게 주어진다.
3. 성경을 주의해보는 것
본문 19절을 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 구절에서 ‘더 확실한 예언’은 구약성경의 메시야 예언을 뜻하고 크게 보면 구약성경 전체를 뜻한다. 또한 샛별은 예수님을 뜻한다. 즉 성경 말씀을 어둠을 비취는 등불처럼 여기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성경을 주의해서 보라는 말씀이다.
왜 베드로는 성경을 주의해서 보라고 당부했는가? 그만큼 당시 거짓 선생들의 미혹이 심했기 때문이다. 거짓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는가? 성경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문서다. 그 약속문서를 붙잡고 사는 것이 축복받는 제일 기초 비결이다.
어떤 성도는 성경을 머리맡에 놓고 자면 잠자리가 편해진다고 한다. 그런 태도도 성경을 중시하는 마음의 표현이지만 너무 지나치면 무속적인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다. 진짜 중요한 태도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고 힘써 순종하는 태도다. 때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성경의 약속을 믿고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임을 믿고 나가면 어떤 문제도 극복하고 작품인생을 만들어낼 수 있다.
4.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않는 것
베드로는 성경 및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면 안 된다고 했다(20절). 성경 말씀과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21절). 당시 거짓 교사들은 재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면서 자기 멋대로 내세운 계시와 해석으로 영혼을 낚아챘다. 그런 거짓 교사들에게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베드로는 경고한 것이다.
요즘도 그런 거짓 교사들이 많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은 인정하지만 자기도 성령의 감동대로 계시하고 해석하기에 그만큼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주석을 참고하고 남들의 지혜도 참고하고 깊은 묵상과 연구로 성경해석에 땀 흘리는 것은 인간적인 해석이고 자신이 성령의 인도로 즉석에서 해석한 것은 신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즉석 해석에는 오류가 많고 심지어는 성경의 원래 내용과 180도 반대로 해석할 때도 많다. 그런 엉터리 해석을 성령이 주신 해석이라고 하면 얼마나 성령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을 기독교계의 백두산 혈통으로 믿도록 교묘한 언사를 쓰지만 사실상 그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더욱 세상의 조롱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 문제를 잘 극복하는 교계 문화를 새롭게 만들 때 한국교회가 다시 세상의 칭송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다.
< 바른 교회를 추구하라 >
조선 말, 매관매직이 판치던 때, 어떤 관리들은 자신이 부임할 땅을 미리 조사하며 “그곳에 예수교인이 얼마나 있는가?”를 조사했다. 예수교인이 많으면 고관을 찾아가서 다른 고을로 부임하게 해달라고 청탁했다. 자신의 부정부패가 드러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때 교회와 교인은 사회 양심의 잣대였다. 도덕과 윤리가 투철했고 정의의 편에 서서 약자를 도왔으며 일제의 강압통치 때는 애국지사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어떤가? 교회와 관련된 각종 부정적인 소식들이 너무 많이 들린다. 누구 책임인가? 일차적으로 목회자 책임이다. 성도의 수준은 대개 목사의 수준과 비례한다. 속물 리더 밑에서 인물 성도가 나오기 힘들다. 영어 해석도 잘 못하면서 미국 신학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면 내세우기도 부끄러운 일이다.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대개 보면 “물질축복!”도 강조함으로 참된 성령충만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경우도 많다.
왜 종교인들이 물질축복에 사로잡히는가? 어렵게 살아온 환경 영향도 크다. 어릴 적의 고난과 가난을 잘 극복하지 못하면 2가지 문제 가능성도 커진다. 하나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심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쉽게 하는 것’이다. 동양문화에서는 거짓말보다 간통죄를 크게 보지만 서양문화에서는 간통죄보다 거짓말을 더욱 큰 죄로 여긴다. 닉슨 대통령은 도청했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거짓말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왜 동양에서는 거짓말을 큰 죄로 안 보는가? 일종의 처세술로 여기는 문화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거짓말의 천재인 제갈공명을 존경한다. 그처럼 동양문화권에서 거짓말을 큰 죄로 여기지 않기에 거짓말로 혹세무민해서 왕국을 이룬 거짓 교회들과 거짓 메시야가 유독 동양에 많다. 어떤 사람은 모르고 당한다. 어떤 사람은 거짓임을 알고도 지혜나 처세로 여기며 용납한다. 어떤 사람은 거짓임을 알고도 교회 권력의 단맛에 취해 묵인한다. 어떤 사람은 거짓임을 알고도 교주의 저주가 무서워 쉬쉬한다. 그러면 문제가 커진다.
한국에도 예언, 치유, 축귀 등에 등장하는 수많은 종교인의 거짓을 지혜나 처세가 아닌 범죄로 여기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종교자유와 혹세무민은 다른 것이다. 혹세무민은 공권력이 적극 제지해야 한다. 그런 제동장치가 없으니까 미국에서 전혀 인정 못 받는 이단 목사가 한국에 와서 위대한 신 사도처럼 숭배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인들이 매번 당하니까 거짓 신 사도들은 한국을 최대의 영혼사냥 놀이터로 삼고 있다. 영어로 설교하면 왠지 신령하게 보는 무지는 더 이상 없어야 하고 더 이상 묵인되어도 안 된다.
미국에서는 카운슬링도 면허가 없으면 원칙적으로는 불법이다. 즉 “믿음으로 약을 끊으세요. 40일 금식기도 하면 나을 거예요.”라고 말했다가 죽어서 소송을 당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 결국 거짓 메시야의 등장이나 거짓말로 인한 혹세무민이 힘든 사회구조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종교인들은 서슴없이 그런 유사한 상담을 해준다. 나중에 그 말이 틀렸다고 판명 나고 심지어는 죽어도 좋은 의도로 그런 말을 해준 것으로 여기고 대개 눈감아준다. 그래서 자칭 신령한 종교인들의 무책임한 혹세무민의 말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어느 주일에 목회자가 강단에서 선포한다. “지금 관절염이 나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나았다고 일어난다. 약 한 달쯤 후에 “지금 관절염이 나았습니다.”라고 하면 같은 사람이 또 일어난다. 누군가 묻는다. “왜 매번 나았다고 그렇게 일어나나요?” 그가 말한다. “나을 것이라고 믿고 일어나는 겁니다.” 나았다는 말과 나을 것이란 말이 어떻게 같은가? 결국 하나도 안 나았다는 뜻이다. 그처럼 믿음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니까 거짓 치유자들이 대 교회를 이루고 체육관 집회를 하는 것이다.
의도가 좋다면 거짓말도 용납해주는 동양문화는 좋은 문화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도 바뀌어야 하지만 교회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좋은 교회 문화는 계승해야 하지만 거짓을 쉽게 눈감아주는 교회 문화에는 젖어들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거짓이 수많은 영혼들을 망치고 죽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당한 피해는 참는다고 해도 다른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명백하면 용감하게 소송을 해서라도 그 거짓을 막아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런 문화에 젖지 않고 자신부터 늘 새로워지기를 힘쓰는 것이다.
< 자신부터 새로워지라 >
살다 보면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별로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잘못된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고 자신이라도 최선을 다해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뒷 파도만이 앞 파도를 물리칠 수 있다. 아무리 호수가 흙탕물이라도 물 근원이 맑으면 그 호수는 맑아진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는 문제는 결국 자신의 문제다. 교회의 불의한 모습에 실망하지 말고 자신이라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면 된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싶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처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처럼 죄짓는 것이 괴로운 성도가 많아져야 앞 물결을 밀어내고 새로운 물결을 흘려보낼 수 있다.
어느 날, 서울 법대 다니는 한 청년이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법조인들의 불의한 판결을 보니까 대학 다니고 판검사가 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노동판에 뛰어들겠습니다.” 그때 목사가 말했다. “형제! 자네가 법조인들이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그들은 변하지 않아. 자네가 고시를 패스하고 판검사가 되어서 자네라도 지금의 그 선한 마음을 10년만 유지하면 그 부분은 달라지지 않겠나? 열심히 공부하게.”
그 말을 듣고 청년이 열심히 공부해서 4학년 때 고시를 패스했다. 그리고 검사로 임관한 후 한 단체에서 밤에 고아들을 가르치는 야학 선생을 꾸준히 했다. 그렇게 변화된 한 사람이 잘하면 그 부분은 변화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변화되고 자신이 인물 되는 것이다. 본능적인 입술을 잘 억제해서 다음과 같은 말은 가급적 줄이라. “교인이 왜 저래! 교회가 왜 저렇게 사랑도 없어!” 교인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교회가 왜 사랑도 없어!”라고 하는 사람이 대개 더 사랑이 없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남이 사랑이 없다는 말이 자신의 삶과 입에 배지 않아서 그런 말을 잘 못한다. 욕이 입에 배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도 욕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 없는 행동을 잘 못하는 사람은 사랑 없는 말도 잘 못한다. 결국 “아무개가 사랑이 없어!”라고 하는 말은 “내가 사랑이 없어!”라고 하는 말과 사실상 거의 동의어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흔한 욕은 아람어로 ‘레카(라가)’란 욕이었다(마 5:22). 그것은 ‘우매한 놈’이란 뜻으로서 당시에 가장 흔한 욕이었기에 우리말로 하면 ‘개OO’와 같은 종류의 욕이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도 ‘라가’란 말을 자주 언급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렇게 기도한 셈이다. “하나님! 그 개OO 못된 새끼입니다. 그런 새끼를 혼쭐 내주세요.”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기도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욕으로 받으시기에 예수님은 그런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엄중히 경고하셨다.
당시에 한 지역 공회에서 재판이 열렸다. 지방행정관이 재판을 진행하는데 원고가 재판정에서 피고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행정관님! 저 개OO 나쁜 새끼입니다.” 그렇게 계속 욕하면서 피고를 처벌해달라고 했다. 그때 지방행정관은 오히려 원고를 무고죄로 옥에 넣었다. 자신 앞에서 ‘라가’란 말을 너무 많이 쓰는 원고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법정과 자신을 모독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요새는 판사도 말을 조심한다. 하물며 재판 대상이 법정에서 욕하면 얼마나 판사가 모욕감을 느끼겠는가?
왜 예수님은 형제를 욕하면서 정죄하지 말라고 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욕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모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욕하는 사람의 정의는 정의로 인정받기 힘들듯이 사랑 없는 사람이 하는 사랑이 없다는 말은 공허한 외침이 된다. 자신에게 사랑이 없기에 남이 사랑이 없다고 쉽게 정죄하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대개 그렇다.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온 “아무개가 인격이 안됐어.”라는 말은 “내가 인격이 안됐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다.
남의 못된 것이 보이면 그것을 자신의 거울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깊이 성찰해보면 남을 비판하는 그 문제가 자신 안에도 들어있다.
남의 못된 것이 보이면 얼른 자기 모습도 살피고 거기서 자기 모습을 발견한 후 기도하라. “하나님! 그 사람 때문에 제 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소서!”
아픈 말을 들으면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해!”라고 하지 말고 그때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기도해보라. “하나님! 제 부족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겠지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약자나 실패자는 될 수 있어도 위선자는 되지 않는다. 아픔이 있을 때 그 아픔을 회개의 기회로 삼으며 환경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자신을 세우려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된 성도가 된다.
지상 교회와 교인은 완벽하지 않다. 살다 보면 교회와 교인의 부족한 모습을 수시로 목격한다. 그때 정죄 대신 자기 성찰의 기도를 하며 자기변화부터 꾀하려고 하라. 그러면 자신의 맑은 물로 한국교회는 조금 더 새롭게 된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그런 정화장치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원했다. 베드로의 그 소원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물 되는 길을 추구하고 자기변화를 잘 이뤄냄으로 사회의 거룩한 정화장치 역할을 잘 감당하라.<성경66권 설교파일 중에서 베드로후서 3번째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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