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을 좇지 말라
본문에서 ‘다른 복음’이란 어휘가 반복해 나오는 것을 가볍게 보지 말라. 왜 바울이 계속 다른 복음을 언급하는가? 초대 교회에서는 이런 논란이 계속 있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 중요한가?” 오늘날의 성도들은 은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바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바울이 은혜의 복음을 전했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에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들 중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교인이 많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율법의 아들’로 있었기에 그 관성이 남아서 은혜의 진리에 행위의 원리를 덧붙였다. 바울은 그런 태도가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심각한 태도임을 깨닫고 그런 왜곡된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 지칭하며 피하라고 했다.
4가지 구원론이 있다. 첫째, 은혜주의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참된 복음’이다. 둘째, 율법주의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복음’이다. 셋째, 혼합주의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만 인간의 행위도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다른 복음’이다. 넷째, 반 율법주의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맘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또 하나의 ‘다른 복음’이다.
은혜로 구원을 받아도 율법을 전혀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반 율법주의는 은혜의 참된 의미를 왜곡한다. 어떤 교인은 생각한다. “나를 뭐로 알아!” 그런 생각은 시험에 들기 좋은 생각이다. 은혜가 없는 자는 “나는 무엇인가 대단한 존재다(I am something).”라고 착각하지만 은혜가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I am nothing).”라고 고백한다. 후자가 진짜로 은혜받은 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신발이 해어지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수시로 불평하다가 결국 광야에서 대부분 죽었다. 공짜로 은혜를 받았다고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맘대로 행동하지 말라. 모든 것을 감사 제목으로 승화시키라. 어떤 사람은 불평한다.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 이렇게 고생하나?” 그러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하라.
불평이 습관화되면 회개할 일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혹시 하더라도 폼 잡고 회개한다. 그처럼 인간은 끝까지 버틴다. 어떤 부자 자녀는 감사를 모른다. 조금만 힘들어도 수많은 감사 조건을 다 잊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습관적인 불평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표시다. 마음에 불평이 넘치면 일의 시작도 보류하고 판단과 결단도 보류하라. 불평은 불행을 낳고 감사는 행복을 낳는다. 하나님은 습관적인 불평분자를 축복하시지 않는다. 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신적인 은혜를 인간적인 율법으로 대체시키지 말라.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했지만 은혜가 없는 행함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면서 멋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행함도 필요하다. 그 필요성을 느낄 때 슬쩍 끼어든 사상이 갈라디아니즘으로 일컬어지는 ‘다른 복음’이다. 갈라디아니즘은 주장한다. “사람은 은혜로 구원받고 행위로 구원이 완성된다.” 언뜻 보면 그럴듯해서 일부 갈라디아 교인이 그 사상에 넘어갔지만 사실상 갈라디아니즘에는 구원이 없다. - <월간새벽기도> 21년 11월호 중에서 발췌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