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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는 1992년 목사 안수를 받고 이듬해 괌(Guam) 아래의 축(Chuuk)이란 남태평양의 한 작은 섬으로 선교를 떠났다. 문화시설이 거의 없는 그곳에서 약 30여명의 원주민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축은 온도가 30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는데 습도까지 높아 그곳에서 냉장고도 없이 사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3년 만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근육과 심장에 문제가 생겨 1996년 자신의 제 2의 고향인 뉴욕으로 철수했다.
그 후 1년 만에 건강을 회복하고 뉴욕에서 선교 지향적인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 이름을 “동쪽 끝부터 서쪽 끝까지 선교하자!”는 의미로 뉴욕 동서선교교회라고 지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선교 비전을 심어주며 계속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많이 나누게 하시고 우리 중에 나눌 줄 아는 의로운 큰손이 많이 나오게 하소서!”
점차 교인들이 강력한 선교 비전을 가지게 되면서 눈빛은 초롱초롱해지고 사는 모습과 일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1999년 그 교회는 이런 표어를 세웠다. “많이 나눠주는 해!” 이듬해 2000년에는 이렇게 표어를 세웠다. “가장 많이 나눠주는 해!” 다시 이듬해 2001년에는 이렇게 표어를 세웠다. “작년보다 더 많이 나눠주는 해!”
그렇게 계속 나눔의 비전을 도전하자 성도들도 크게 축복받으면서 그 작은 교회가 많은 선교사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물질을 나눠주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임 선교사는 직접 자기 몸까지 나눠주려고 마침내 2002년에 몽골 선교사로 갈 것을 자원했다. 선교 인생 1막 때는 지구상에서 가장 덥고 습한 곳으로 갔고 선교 인생 2막 때는 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건조한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누구도 임 선교사 부부의 선교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그를 파송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은 원래 40세 이상은 선교사로 파송을 하지 않았다. 실제 사역할 수 있는 기간이 짧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임 선교사처럼 자녀가 3명이 있으면 새로 선교사로 파송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경비도 훨씬 더 많기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한 소명과 비전과 열정으로 임 선교사는 48세의 나이에 극적으로 선교사 파송 인터뷰를 통과할 수 있었다.
2002년 8월 1일 48세의 늦은 나이로 미국을 떠나 몽골로 출발했다. 그때 그는 선교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이도 많고 아이도 많아서 부담이 더 되는 제게 선교사의 길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과 선교연맹에 감사합니다. 특별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안부를 물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이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정든 고향과 가족과 친지들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래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간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8월 3일 임 선교사 부부는 몽골의 울란바토르 공항에 30킬로그램 짐 22개를 가지고 도착했다. 다음 날 일주일간 몽골에서 열렸던 필드 포럼(Field forum)에서 먼저 파송되어 있던 김재호 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거기서 김 선교사의 아내가 일주일 내내 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눈물은 선교지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로 인한 눈물이었고 동시에 포럼 기간 중에 동역자로부터 받은 은혜와 위로로 인한 감격의 눈물이었다.
몽골인들은 맘에 들지 않거나 의심 가는 사람은 말을 때리듯이 손으로 세게 때리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김 선교사의 아내는 시장에 갈 때 가끔 그런 모욕을 당했다. 물건을 사려고 가까이 갈 때 행색이 초라해 보이니까 물건을 훔쳐갈 줄 알고 물건 가까이 못 오게 때린 것이었다. 당시 김 선교사의 아내가 선교지에서 고생하면서 그런 오해를 받을 정도로 행색이 초라해 보였기에 그런 수모를 받은 것이었다.
선교사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환경이 열악한 나라로 여행하면 특급호텔에서 머물러도 며칠 이상 지내기 힘들다. 그런데 언어도 잘 통하지 않고 음식도 맞지 않고 문화시설도 열악한 곳에서 몇 년을 보낸다는 것은 사역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그것만으로도 눈물겨운 일이다. 어린 자녀들이 까닭모를 고생을 하며 현지적응을 하는 과정에서도 상처가 많다. 그래서 후방의 성도들은 선교사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어야 한다.
비록 늦은 나이에 몽골 선교를 떠났지만 임 선교사를 통해 2기 사역까지 몽골 전역에 14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다. 몽골로 파송된 대부분의 한국인 선교사들이 수도 울란바토르를 중심으로 사역하지만 임 선교사 부부는 수도에서 차로 5시간 올라가는 이르틴을 중심으로 사역하면서 몽골 전역에 14개 교회를 개척한 것이었다. 그리고 3기 사역이 끝나는 2016년까지는 총 30개 교회를 개척하려고 열심히 뛰고 있다.
지난 10여년의 몽골 사역을 통해 아쉬운 점도 많았다. 교회도 많이 개척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몽골 교인들의 진정한 회심인 것을 깨달았다. 또한 일부 어려워진 교회들이 폐쇄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개척 만큼 중요한 것이 교회를 잘 돌보는 것임도 깨달았다. 그래서 몽골 교회 리더들에게 교회가 문을 닫으면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강조하며 교회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했다.
교회가 늘어날수록 기쁨도 늘었지만 문제와 이슈도 늘었다. 얼마 전에는 중하라 교회의 현지 지도자 간치믹이 크게 낙심된 상태였다. 현재 예배드리는 교회 건물이 많이 낡아서 몇 년 전부터 시에서 시정명령이 떨어진 상태였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예배드리기 힘든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을 보고 임 선교사가 선교사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이 마음속에 이런 음성을 주셨다. “내가 내 피로 산 교회니 잘 돌보라!” 그 음성을 들으면서 지금 그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다.
최근에는 중살라 교회에 기도제목이 생겼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중살라에 개척된 그 교회는 남의 땅을 빌려서 텐트(게르)를 치고 예배드리는 상태였다. 그것을 그 땅 주인들이 싫어해서 예배 공간을 찾다가 마땅한 작은 땅을 찾게 되었다($9000). 임 선교사와 중살라 교회 교인들은 그 땅의 구입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130년 전 흑암 중에 살던 우리나라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두 선교사가 찾아와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그래서 희망의 빛이 비춰졌고 우리나라는 지금 어느 정도 잘살게 되었다.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모두가 마땅히 선교에 동참해야 하지만 다 선교지로 갈 수 없기에 우리를 대신해 선교지에 간 선교사들을 위해 열심히 후방에서 기도로 동참해야 한다.
주님은 승천하실 때 마지막 명령으로 선교 명령을 남겼다. 그러므로 선교를 위해서라면 마음과 정성과 물질과 시간과 땀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중에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도록 항상 선교과 나눔에 힘써 동참하며 ‘전방으로 가는 선교사’가 되든지 혹은 ‘후방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는 꼭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