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은 언젠가 현실이 된다
-기독교선교연맹 창시자 심슨 스토리-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미국 성결교)의 창시자인 심슨(A. B. Simpson)은 20대 초반부터 탁월한 설교자로 소문났다. 어느 날, 20대 초반의 심슨이 어떤 교회로 설교초청을 받아 갔다. 당시 그 교회를 다니는 한 중직 교인은 심슨이 강단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해프닝도 연출했다. 그런 풋내기가 그날의 초청강사임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슨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곧 역전되고 모든 청중이 나이를 초월해 그를 존경했다.
심슨은 1865년 4월, 캐나다의 낙스(Knox)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해밀턴시 낙스 교회의 임시설교자가 되었다. 그 교회는 유력 교인들이 많았던 캐나다의 핵심 장로교회였다. 임시설교자가 된지 2개월 만에 교인들은 21세의 심슨을 만장일치로 담임목사로 추대했다. 그 후 심슨은 낙스 교회를 캐나다에서 2번째로 큰 장로교회로 성장시켰다.
어느 날, 심슨이 미국 뉴욕의 장로교 총회에서 초청강사로 설교할 때 켄터키 루이빌에서 온 체스트넛(Chestnut) 장로교회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아 심슨을 자기 교회로 모셔오기로 했다. 다른 교회들도 심슨을 담임목사로 모시려고 각축을 벌였다. 인생은 묘하다. 기회주의자는 항상 기회를 노려도 기회를 못 얻지만 묵묵히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기회의 문이 활짝 열린다.
결국 심슨은 체스트넛 장로교회로 부임했지만 그 교회가 심슨을 품기에는 심슨의 비전과 그릇이 너무 컸다. 그때 심슨은 ‘선교와 나눔’을 강조했지만 교인들은 엄청난 부채를 감수한 ‘화려한 성전건축’을 원했다. 그때 심슨은 교인들과 다투며 자기주장을 관철하기보다는 선교비전을 폭넓게 펼치기 위해 루이빌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뉴욕의 13가 장로교회로 부임했다.
그때부터 뉴욕 13가 장로교회의 교인이 급증했다. 그러나 신입교인 중에 가난한 서민들도 많았기에 일부 교인들이 싫어했다. 그들은 유력한 상류층 교인이 주류인 13가 장로교회가 도시 빈민들이 많은 교회로 소문나면 상류층 사람들이 등록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어느 날, 심슨은 뉴욕 빈민 선교운동을 통해 전도한 이태리 출신 노동자 100명을 신입교인으로 받아달라고 교인총회에 요청했다. 당회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때 심슨은 기존교회의 틀에서 도시선교 및 세계선교의 비전을 펼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아무 준비도 없이 과감히 13가 교회를 사임했다.
당장 아내와 네 자녀를 부양할 길이 막막했다. 뉴욕의 대표적인 교회에서 설교하던 유명 인사가 갑자기 도시 미아가 된 것 같았다. 후원자도 없었고 직장도 구할 수 없었다. ‘도시선교와 세계선교의 비전’을 수행할 길도 막막했다. 심슨을 아끼던 동료 목사들은 현실에 순응하라고 진심으로 충고했지만 그는 선교비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그에게는 사람도 없었고 물질도 없었지만 선교비전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1881년 11월 20일, 그는 한 클럽의 홀에서 소수의 무리에게 뉴욕에 새로운 영적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한 후 그 취지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3일 후에 만나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3일 후에 7명이 모였다. 춥고 음산한 홀 구석의 작은 난로주위에 웅크린 채 그들은 언 손으로 성경책을 열고 스가랴 4장 6절과 10절을 읽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그때 심슨과 7명의 성도는 자신들이 가난하고 약한 소수임을 감사하면서 매일 야간집회를 열고 그 집회 전에 노방전도를 다녔다. 그때 4가지 원칙을 세워 예배를 드렸다. 첫째, 예배가 지겹게 되지 않도록 힘썼고, 둘째, 설교는 가능하면 짧게 했고, 셋째,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고, 넷째, 타 교단이나 교회에 대한 험담은 절대 하지 않았다.
1년 반이 지난 1883년 초, 등록교인수가 7명에서 217명이 되었고 주일예배에는 700여명이 참석했다. 점점 매스컴은 심슨을 제 2의 무디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게 시작된 ‘기독교 선교연맹’은 약 130년이 지난 지금은 전 세계에 천 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해 복음을 전하면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전 세계에 6만 개 이상의 소속교회와 6백만 명 이상의 소속교인이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 불가능은 없다. 거룩한 비전은 반드시 이뤄진다.
심슨 목사는 건물보다 문서를 중시해서 문서선교에 힘썼고 ‘다수의 대중’보다 ‘소수의 인물’에 더 큰 희망을 두고 교육에도 힘썼다. 1883년, 심슨 목사는 준비되지 않은 선교사가 끼칠 해독을 알고 뉴욕 8가에서 선교사 훈련학교를 시작했다. 그때 교수진은 심슨과 조지 미드 목사를 비롯해서 피어선, 조지 펜타코스트, 아도니람 고든, 제임스 브룩스 등 당시 동부의 유명한 복음주의 목사들이 망라되었다. 그 학교가 뉴욕에 있는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은 명문 기독교 대학인 지금의 나약대학(Nyack University)이다.
심슨 목사는 한국에서는 찬송가 <어저께나 오늘이나(135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302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430장),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441장), 네 병든 손 내밀라고(472장)>를 지은 목회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가 추구하는 교파를 초월한 선교비전은 전 세계의 건전한 복음주의 교단들과 교회들에게 많은 영향과 도전을 주고 있다.
필자는 1991년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의 선교비전 및 노하우를 한국에 접목시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홀로 귀국했다. 그때는 물질도 없었고, 살 집도 없었고, 동역자도 없었다. 그러나 비전을 따라 유럽으로 건너간 바울을 위해 루디아를 예비했듯이 하나님은 루디아 같은 은밀한 동역자를 연결시켜주셨다. 때로는 피가 하나도 안 섞인 그들을 통해 개인적인 필요도 극적으로 채움 받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때로는 물이 피보다 진할 때가 있다. 그 물이 거룩한 비전이 투영된 물인 경우에는 그렇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지금까지 요삼일육선교회, 네트영어, 미션퍼블릭, 온라인 새벽기도 등으로 사역지경이 넓혀지다가 마침내 한 후원자의 은밀한 후원으로 월새기(월간 새벽기도)를 발행해 더 높은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그 동안 비전성취가 지체되고 때로는 비전의 포기를 강요하는 시련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뭘 믿고 그런 꿈을 꾸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비전을 향해 나아갔기에 부요하신 하나님의 신비한 도우심이 따르게 되었다.
심슨 목사는 말했다. “신기루 같은 비전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언젠가 현실이 된다.” 삶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사는 사람들이 수시로 체험하는 신기한 사실은 “미래는 꿈대로 펼쳐지고, 생각대로 펼쳐지고, 비전대로 펼쳐질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소유가 작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거룩한 일에 드릴 줄 아는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다. 남이 자신을 멸시해도 자신은 자신을 멸시하지 않으면 된다. 거룩한 비전에 자신을 드릴 수만 있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