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시는 하나님 (시편 139편 1-12절)
< 나를 아시는 하나님 >
어떤 나라도 그 나라의 종교 개념 이상의 나라를 만들 수 없고 어떤 종교도 그 종교의 신 개념 이상의 종교를 만들 수 없다. 신 개념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지식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인가?”에 대한 지식은 믿음생활의 가장 중요한 토대다. 다윗은 그 지식이 풍성했기에 견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나를 아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
오늘날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인한 지식의 확대와 발전이 놀랍다. 그래도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에 비하면 인간의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광대한 지식의 극히 일부분을 발견해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의 지식발전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도 잘 모른다. 때로는 남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안다. 특히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계신다.
본문 1절을 보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알고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속이거나 감출 것이 없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말은 기쁜 일이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왜 기쁜 일인가? 하나님께서 내 수고와 사정을 다 알아주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왜 두려운 일인가? 하나님께서 내 죄와 허물까지 다 아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시는가? 첫째, 나의 행위와 생각을 아신다(2절). 본문 2절에 표현된 ‘앉고 일어섬’은 사람의 모든 행위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행위를 보시고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살피신다.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주시기 위해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행위뿐만 아니라 생각과 속마음까지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만 먹어도 은혜와 능력을 더해주신다.
초대교회 때 사람들이 밭과 집을 팔아 하나님께 바칠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하나님께 바칠 마음을 먹고 자기들의 소유를 팔았다. 그러나 팔고 나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절반만 바치면서 다 바친 것처럼 했다. 그때 베드로는 그들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고 했다. 결국 그들 부부는 죽게 되었다.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내면의 진실을 보고 길을 열어주신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이 기름 부을 자를 찾으려고 베들레헴에 가서 상당한 재목으로 소문난 이새의 아들들을 불렀다. 처음에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장자 엘리압을 보고 무릎을 치며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실 자가 이 청년이구나.”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했다. “나는 용모와 신장을 보지 않는다.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본다.”
엘리압은 용모와 신장은 있었지만 헌신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왕의 재목은 아니었다. 반면에 그때 다윗은 사무엘 앞에 나타나지 않고 형들에게 말했다. “형님들! 다 선지자에게 가세요. 제가 혼자 들에서 양떼를 지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헌신하는 마음을 보시고 오히려 다윗을 찾아 기름을 부으셨다. 하나님은 내면의 욕심을 다 아신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한다. 믿음생활을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생각만 하면 더 받지 못하지만 드릴 생각을 하면 더 좋은 것을 받는다.<2017.6.29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