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생활의 축복(1) (느헤미야 13장 10-14절)
1. 성도의 책임감을 나타내는 것
왜 십일조를 드리는가? 기본적으로 십일조는 사역자의 생활을 위해 드리는 것이다. 느헤미야 10장 37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십일조의 원활한 징수를 위해 레위 사람들을 각 성읍에 주재시켰다. 그러나 백성들은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다시 십일조 생활을 외면했다. 그처럼 십일조를 작정한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자 성전 종사자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원래 경작하던 밭으로 도망쳤다(10절).
그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니, 하나님의 일꾼이 죽기까지 인내해야지 고작 먹고사는 문제로 사명을 팽개치나?” 아무리 바른 말도 남의 십자가에 대한 말은 쉽게 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교양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일을 등한시했구나! 우리가 너무 무책임해서 이런 일이 생겼구나!” 누구의 생각이 책임적인 생각인가? 당연히 후자의 생각이다. 십일조는 성도의 책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지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인데 지금은 은혜시대니까 그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것도 무책임한 생각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사역자의 생활비는 필요하다. 구약의 율법시대에는 먹으면서 사역하고 신약의 은혜시대에는 굶으면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율법에서 정한 법만이 아니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 전에 이미 드려졌었다.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드렸고(창 14:20) 야곱도 십일조를 드렸다(창 28:22).
예수님도 십일조를 인정하셨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이 말씀에서 ‘이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뜻하고 ‘저것’은 헌물과 십일조를 뜻한다. 그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율법주의를 버리려다가 율법까지 버리는 것은 더러워진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목욕하는 애까지 함께 버리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의 축복에 대해 말하면 “축복을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기복주의다.”라고 하면서 십일조를 아예 안 드린다. 그러나 십일조는 축복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교회운영과 사역자의 생활을 위해 드리는 것이다. 그런 책임감을 느끼고 헌신할 때 하나님이 축복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이지 축복이란 결과물을 얻으려고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이 아니다.
은혜를 내세워 기본헌신도 외면하는 맹탕 신앙이 되면 은혜도 맹탕이 된다. ‘미신적인 율법주의’도 버려야 하지만 ‘맹탕 은혜주의’에 빠져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도 버려야 한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 목회학 교수 프랭크 색슨이 은퇴하며 말했다. “미국 교회가 부흥된 때는 교인들이 십일조의 책임을 다하던 때였습니다.” 성도가 십일조의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도 그 성도를 책임을 다해 지켜주실 것이다. <2016.8.29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